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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m May 31. 2023

이건 하나의 정화의식이다.

우리 집 가전이야기 - 제습기


여름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삐질삐질 난다. 습한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여름이 너무 힘들다. 고온다습한 바깥 날씨뿐만 아니라 에어컨 온도를 어중간하게 맞췄을 때의 그 소름 돋게 습하고 서늘한 상태, 뼛속까지 시린 그 느낌이 너무 견디기 힘들다.


습도가 올라갈수록 불쾌지수도 올라간다. 별일 아닌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이 정도면 공기 중의 H2O 입자만큼 화가 머무르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물 입자 하나하나에 스민 화가 어딘가에서는 비가 되어 흘러가져야 하는데, 구천을 떠돌며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에 치이고 있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또 하고 있노라면 우리 집 화를 삼켜내 주는 눈앞의 저 제습기가 참 고마울 따름이다. 집 안의 쾌적한 공기 속에선  일이 별로 없다. 그는 가정의 평화를 지킨다. 뽀송한 목덜미는 행복의 척도다.


그는 습도 센서로 나의 눈치를 재빠르게 살피고 습한 공기를 받아들여 조용히 내 화를 빨아들인다.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으로 어린 중생을 보살펴 주는 가전계의 관세음보살이 따로 없다.


오늘도 누군가를 향한 짜증이 되었을지 모를 H2O가 방울방울 제습기 통 안에 흘러내린다.


수통에 가득 고인 물을 비워낸다.

이고 지고 있던 생각들을 함께 비운다.

이건 하나의 정화의식이다.


아씨유(I see you).

아바타 나비족처럼 인사를 건넨다.

나와 제습기는 이렇게 서로를 돌보고 있다.


비움의 길은 멀구나, 너나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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