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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m Aug 01. 2023

우리 집엔 행복이 자란다.

우리 집 식물 이야기 - 수채화 고무나무


2년 전 여름. 남편과 4년여 만에 건강검진을 받았다.

좀 더 일찍 받으려던 것을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미루고 미루다 2021년 늦여름이 되어서야 날짜를 잡았다. 건강검진 당일이 되어 나도 남편과 함께 수면 내시경을 마치고 비몽사몽인 정신으로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남편이 나오더니 무슨 검사를 더 해야 된다고 했다며 보호자인 나를 데리러 왔다.


그날 오후의 긴 얘기를 줄이자면 남편 대장내시경 검사 결과 용종이 발견됐고, 크기나 형태로 보아 암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살얼음 같은 를 보내고, 다행히도 한 대학병원에서 긴급하게 ESD 시술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이유는 교수님이 남편을 이미 암 환자라고 생각해서 시술 날짜를 당겨 잡아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날짜가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암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시술까지 통상 6개월을 대기해야 한다던 그 대학병원에서 남편은 채 일주일도 안 남은 날짜로 시술 예약을 잡았다.


병원에서는 '용종만 도려내는 ESD 시술을 진행하겠지만 침윤 정도보고 안 되면 시술은 중단될 것이며, 그 경우 대장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 날짜를 다시 잡아야 한다'고 했다. 다른 대학병원에서도 똑같은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제발 시술이 중단되지 않고 끝나기를 내내 기도했다.

천만다행으로 시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렇게 ESD 시술을 마치고,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때였다.

시술 2주 후로 잡힌 진료일을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길기만 했다. 건강검진 이후로 남편은 자꾸 생각이 많아져 힘들다며 하루에 몇만 보씩을 걷고 또 걸었다. 그날도 남편과 복잡한 심경으로 말없이 걷고 있는데 꽃집 앞에 놓인 화분들이 눈에 띄었다. 남편과 마음이 통해 화분을 하나 집에 들이기로 했다. 기왕이면 꽃말이 좋은 걸로 사자며 마음에 드는 식물마다 하나하나 꽃말을 검색하다가 딱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다.

'영원한 행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수채화 고무나무.

 

가장 예쁜 나무를 골라 집에 들어가는데 화분을  남편의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고무나무가 본인의 건강이라도 되는 마냥 애지중지 화분을 꼭 안고 걸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해가 제일 잘 드는 거실 창가 한가운데에 새로 산 화분을 두었다.

이미 우리 집에 '영원한 행복'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 것만 같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일주일여가 지나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진료일까지는 아직 5일이 남았지만, 병원 앱에서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검사 결과지를 뽑으러 갔다. 영어로 된 전문용어가 가득한 결과지를 들고 한 단어 한 단어 번역하며 의미를 해석해 나갔다. 혹시 몰라 암 환우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도 결과지 해석을 부탁드렸다.


고도 이형성 관융모샘종 (Tubulovillous adenoma with focal high grade dysplasia)

남편에게서 떼어낸 용종은 침윤의 깊이나 이형성 진행 정도를 보았을 때, 흔히들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라고 말하는 상태였다.

그래 다행이었다. 우린 '조금 더' 늦지 않았으니.


잠시 후 평소처럼 점심식사를 마친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도 혼자 산책하고 있다며 힘없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당장 남편에게 "암은 아니래!" 알려주고 싶은데 확실히 교수님 진단을 받은 게 아니라서 혹시 몰라 며칠만 더 참기로 했다. 괜한 기대를 심어줬다가 진료일에 예상과 다른 결과를 듣는다면  충격은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진료일을 일주일이 안 되게 앞두고 있어 남편도 온통 검사 결과 생각뿐인지 정적 한번, 한숨 한번, 시답지 않은 짧은 대화 한 번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안 그래도 걱정 많은 남편을 이대로 계속 걱정하게 두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티가 났는지 남편이 "무슨 일 있어?"하고 물어왔다. 


처음 생각과 달리 내 입에선 무슨 Play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말이 터져 나왔다. 실은 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결과를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암은 아닌 거 같다고. 머리는 '혹시라도 아니면 어쩌려고 그래!' 하며 다그치는데 입에 다른 인격체라도 달린 것처럼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남편은 정말이냐고, 더 빨리 말해주지 그랬냐며 울먹거렸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남편의 기쁜 목소리였다. 시부모님께도 어서 이 소식을 알려드려야겠다며 전화를 끊자는 들뜬 남편의 목소리에 남은 5일이라도 마음 편히 기다리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료 당일, 우리는 기대한 결과대로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진료실을 나와 남편과 얼싸안고 안도눈물을 찔끔 흘렸다.


힘든 시간을 잘 버텨준 남편, 남편을 잘 치료해 준 병원의 의료진분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답답했을 텐데 믿고 잘 기다려 준 가족들, 남편 일로 회사업무에 집중을 못 하던 나를 다그치지 않고 위로해 준 회사 동료, 그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답답하기만 했던 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큰 힘이 되어준 환우 카페의 얼굴 모를 분들께도 감사했다. 대가 없이 결과지 해석 봉사를 해주시는 의사 선생님들, 식단이나 병원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 따뜻한 위로를 나누었던 환우분들과 그 가족들까지 한분 한분 모두 다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영원한 행복이 달리 있을까?

평범한 하루하루가 감사해지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듬해 봄, 얼음처럼 멈춰있던 수채화 고무나무도 반가운 새잎을 틔웠다.






이제는 우리 집 배경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눈에 띄지는 않지만, 햇살 좋은 날 가만히 창가를 보고 있으면 그때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


오늘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순가. 이렇게 우리가 건강한데!


날이 좋다.

따뜻한 햇살 아래 오늘도 우리 집엔 행복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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