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인상적인 장면인지라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는 법> 같은 글에서 많이 회자되는 순간이 있다.
꽤 오래전에 라디오스타에 김숙이 나왔을 때인데, 무례하게 본인의 외모를 평가하는 모 진행자에게 화를 내거나 그냥 웃고 넘어가지 않고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본 후 "상처 주네?"라는 짧은 한마디로 답한 장면이다.
상처 주네.
이 짧은 네 글자는 무례에 상처받은 이보다 그 상처를 준 주체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도대체 누가 남한테 상처를 입혔어?' 하고. 시선이 집중되자 김숙을 희화화하던 상대방은 되려 민망해하며 바로 사과했고 김숙은 괜찮다며 쿨하게 사과를 받아줬다.
평소에 말주변이 없어서인지 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김숙이 한 것처럼 순간적으로 상대에게 대처하는 것이 언제나 쉽지 않았다. 상처받는 순간에 나에게 던져진 그 공을 상대방에게 토스할 순간적인 기지 같은 게 없어서 버벅대다가 혼자 기분만 상하고 별수 없이 그 순간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그런 관계로 '마상'이라는 단어가 생겼을 때 참으로 반가웠다. 불편한 상황에 최대한 감정을 빼고 "어? 마상"이라고만 하면 분위기가 너무 싸해지지 않으면서 내 기분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상대도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내 인생 첫 '마상'의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거슬러 간다.
삼총사처럼 친하게 지낸 두 친구가 있었는데 그날도 이런저런 얘기 중에 어쩌다가 더 좋아하는 친구를 한 명 지목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나는 둘 다 좋기도 했고 누구 하나 상처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양손을 뻗어 둘을 가리켰고, 그 둘은 서로를 가리켰다. 두 친구를 가리키며 쭉 뻗은 두 손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서로를 가리키던 두 검지손가락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장면이 사진처럼 기억난다. 그 이후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데 '그래, 쟤네는 바로 옆집에 살잖아. 등하교도 같이하니까 더 친할 수밖에 없지.' 하며 열심히 자기합리화했던 것은 기억난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받은 상처는 꽤 컸다.
그 이후였을까? 어떤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100이어도 상대가 나에게 얼마를 줄지 계속 계산하곤 했다. '네가 주는 마음이 50이면 나도 50만, 혹은 그 이하로만 줘야지.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안전한 선택만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쿠크다스처럼 쉽게 바스라지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두르고 지냈다.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공포체험을 하면 박명수가 꼭 "뭐가 무서워?" 하며 겁이 없는 척 소리치지만, 촬영 내내 몽둥이 같은 걸 휘두르고 다녔던 것처럼.
마음은 누구에게 준다고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아껴왔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마음 아낌'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달았지만, 살아온 습관이 있어서 바꾸려고 해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고 싶다. 내가 준 거, 내가 받은 거 재고 따지지 않고 그때의 내 마음만큼 양껏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야 그 관계가 상하지 않고 오래갈 수 있다고. 라면도 사람 사이의 관계도 직사광선을 피하여 통풍이 잘되는 서늘한 곳에 보관해야 하나 보다.
타고나길 예민해서 단어 하나, 표정 하나, 말투 하나 허투루 넘기지 못하고촘촘히 느끼고 꼼꼼히 '마상' 받는 성격인지라 대부분의 관계는 나도 그런 '통풍 사이'를 추구한다. 하지만, 때로는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살 맞대고 오지랖 같은 말들을 건넬 수 있는 '끈적한 사이'가 그리울 때가 있다. 날것의 감정을 격의 없이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이제 그때의 삼총사는 없지만 나한테는 여전히 많은 통풍 사이의 친구, 언니, 동생들이 있고, 난 언제든 끈적한 사이가 될 준비가 돼 있다. 인생은 끝없는 '마상'의 연속이겠지만 때로는 미지근하고 때로는 뜨거운 많은 관계 속에서 잘 한번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