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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m May 18. 2023

식물 카페에서 강퇴당했다.


나이가 드니 꽃이 그렇게 예쁘다.

새로 산 꽃치자를 요리 보고 조리 본다. 4월 식목일을 맞이해 들인 녀석인데 대여섯 개의 꽃치자 화분들 사이에서 꽃봉오리가 가장 많이 달린 애로 고른 것이라 썩 마음에 든다. 갓 피기 시작한 꽃봉오리에서 벌써 바닐라 향이 나는 것 같다.

이렇게 좋은 걸 나만 즐길 순 없지.

"자기야, 이거 향기 맡아봐. 너무 좋지?"

채 피치도 않은 꽃 화분을 날마다 코밑으로 밀어 넣는 나에게 남편은 이모티콘 -_- 같은 표정을 한 채 "어, 좋네" 한다.


우리 집 꽃치자. 치자꽃은 모양도 예쁜데 향기마저 어여쁘다. 왼쪽 상태일 때부터 콧구멍을 들이 밀었다^_^


이렇게 예쁜 꽃치자를 또 한 번 죽일 수는 없다.

사실 작년에 첫사랑 같은 꽃치자를 들였으나 달을 넘기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보낸 전적이 있다. 올해는 미리 공부를 좀 했다. 꽃치자는 산성에 가까운 물을 좋아해서 구연산을 푼 물이나 적어도 하루를 방치한 물을 줘야 한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에 다이소에서 천 원짜리를 영양제를 사 왔는데 '관엽식물용'이라 적혀있어 이걸 줘도 되나 싶다.

혹시 알칼리성 영양제 아냐?


내 금쪽같은 꽃치자에게 독약을 먹일 순 없다. 몇 년째 거의 눈팅만 하던 식물 카페에 글을 올린다.

최근에 가지치기한 홍콩야자 이야기 끝에 '이 영양제 홍콩야자랑 꽃치자 둘 다 줘도 되나요?' 덧붙여 올린다. 내용 대부분과 사진이 홍콩야자 가지치기한 것이라 [관엽식물] 게시판에 올렸더니, 1분도 안 되어서 [질문 게시판]으로 옮겨져 있다. 아, 맞다. 여기 관리가 아주 삼엄한 데였지? 얼렁뚱땅 묻어가려던 내 안일함을 들킨 것 같다.


연쇄살식마인 내 손에서도 쉽게 커 준 고마운 홍콩야자. 우산처럼 키워줄 테다!


바뀐 대로 둘까 하다 내 귀여운 홍콩야자 사진이 질문글 배경으로만 남기엔 아까운 마음에 다시 내용을 분리해서 2개의 글로 나눠 올린다.


글을 올리고 보니 내 글 제목 밑에 빈 프로필 사진칸이 눈에 띈다. 여기 카페에도 귀여운 프로필 사진을 하나 넣어야겠다 싶어 나의 최애 말티즈 '재롱이' 사진을 넣고 나니 안정감이 든다. 프사가 있으면 어쩐지 광고쟁이가 아닌 진짜 사람이 올린 글 같다. 완료를 누르려는데 아래쪽 [카페 운영진에게 성별·연령대 공개] 란이 녹색으로 켜져 있는 게 보인다. 식물 카페에서 카페 운영진에게 굳이 내 성별, 연령을 알릴 필요가 있나 싶어 녹색 버튼을 클릭하니 회색으로 바뀐다.


조금 있다 남편 퇴근 시간이 되어 예약해 둔 캠핑장으로 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얼마 안 가 알람이 울린다.


[카페에서 강제 탈퇴 되었습니다. 사유: 회원정보비공개]


헐. 이게 뭐람.

내가 또 잊고 있던 규정이 있었나 보다.

회원 정보는 반드시 공개해 둬야 한다고 한 번쯤 경고라도 해주지, 카페마다 다른 규정을 전부 외우는 사람 어디 있다고. 일부러 엄청난 신분을 숨기려고 한 것도 아닌데 한 번의 기회도 안 주고 나를 도려낸 카페 매니저에게 서운한 마음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내 손절의 역사가 떠오른다.

물론 처음엔 편견 없는 마음으로 기꺼이 상대를 맞이하지만 그가 선을 넘는 행동을 할 때마다 -1점, -5점씩 쌓아 두었다가, 일정 기준 이하로 점수가 내려가면 '죄송하지만 당신은 저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하고 칼같이 뒤돌아섰다. INFJ Door Slam이라는 표현대로 문을 쾅 닫고 더 이상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다.

내 인생에 그런 사람이 한번 존재해 본 적도 없는 것처럼 매끈하게 다듬어 냈다.


내게 손절 당한 그 사람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경고 한번 없이 이렇게 갑자기 냉랭해졌나 궁금했을까?

아니면 별생각 없이 쟤 왜 저러나 싶었을까?


그 카페 매니저도 나에게 나름의 기회를 줬을까?

단지 규정대로 처리한 사무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지만 쓸데없이 생각해 본다.

난 쓸데없이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니까.


예전에 써둔 글들이라도 지울까 싶어 다시 카페에 재가입하려 하니 아예 가입을 막아두었다. 오... 내가 이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는 안 되지만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를 수밖에.


인터넷에 뚝딱 검색해 탈퇴 카페 글 삭제 방법을 찾아낸다. 카페 우측 상단 [탈퇴 카페] 목록에서 [모두 삭제] 버튼을 눌러 그간 그곳에서 내가 쓴 몇 안 되는 글과 댓글을 전부 지웠다.

이제 내가 그곳에 있었던 흔적은 없다.

강퇴돼서 아쉽지만 아쉽지 않은 척해본다.

그 카페 없이도 잘 먹고 잘살 거다. 흥!



                                        커버이미지 출처: Un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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