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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림 Apr 13. 2020

(하숙)집을 나오면서

나의 리듬과 태도를 지킬 수 있는 곳으로

아무도 원치않는 가족 사진 공개
그래도 깐돌이는 귀엽잖아


우리가족은 부모님, 오빠, 나 그리고 깐돌이(요크셔테리어, 1살)로 구성된 핵가족이다. 나는 그중에서 주워온 자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가족 틈에 좀처럼 섞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나서기를 좋아해 일벌이는 데 선수였지만 우리가족들은 그런 나를 늘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곤 했다. 내가 하는 일이 특히 이해가 가질 않던 아빠는 '그런 거 왜 하느냐', '너 혼자 먹는데 왜 그렇게 힘을 빼가면서 요리를 하느냐', '야근 같은 거 왜 하느냐' 등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에는 곧잘 '왜'라는 의문부사를 붙여 질문하셨다. 소심하고 여린 엄마는 그런 아빠의 무정한 말에 상처를 받고 이제는 아예 대화를 차단하거나 본인의 최근 이슈에 대해 숨기기 급급하지만, 나는 그러면 그럴 수록 마치 밟히며 자라는 잡초처럼 오기를 부렸다. (특히나 이것은 미술인들의 숙명같은 것으로, 이 '이해받지 못함'은 미술인들의 부모자식간에 더 잘 일어난다. 평생을 들여도 자식이 무슨 일을 하는지, 왜 그러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오기들이 때로는 (1)인터뷰 요청, (2)대학원 진학 (3)작업 오퍼 등으로 이어지자, 점점 아빠는 내가 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감추시게 됐다. 물론 당신의 딸이 늘 그래왔듯 '왜'라는 말로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을 것을 깨달으신 것이리라.


(1) 생각버스를 하던 시절, 방문을 닫고 잡지를 열심히 접고(당시 우리는 포스터형의 잡지를 모두 손수 접어서 배포했다) 있다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그거 돈도 안되는 데 왜 하냐'를 운운하시던 아빠는 당신이 아는 유명 언론매체에서 인터뷰를 당하는 딸내미의 모습에 언젠가부터는 말을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돌연 태도를 전환하셨다.

(2) 당신의 딸내미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어떤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 지 전혀 알길이 없는 아빠는 '그냥 일본 어디 갔다더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주변인들을 통해 '그곳 무척 유명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어딘가 흐뭇한지 그뒤로는 조금씩 아는척을 하신다.

(3) 학교 프로젝트긴 했지만, 내 작품이 선정되어 도쿄의 한 호텔 객실에 작품이 걸리게 되었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듣게된 이야기는 마치 무용담처럼 우리집을 넘어 오빠 직장 식구들에게까지 퍼져버렸다.



하숙생 구함 02)111- 1234
잠만 잘 분 구함 02)222-5678


마치 미운오리와 백조가 점점 커나가면서 서로가 다름을 깨닫게 되듯이, 커나가면서 '이 집에서 나는 백조 무리에 잘못 껴든 오리'라는 사실과 끊임없이 마주해야했다. 그러니 가족과 함께 살면서 나는 우리집을 마치 '하숙집'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눈 뜨면 씻고 나가서 할일을 하고 저녁까지 바깥에서 해결하고 돌아와 정말 잠만 자는 그런 집. 태생이 맥시멀리스트니까 오빠보다 큰 방을 쓰고는 있지만 대신 유일하게 베란다를 터버린 냉골이었다. 그러니 방에는 더욱이 정붙일 일이 없었고 내게는 그 방이 마치 옷방 혹은 서재와 같은, '기능'으로써의 공간에 그쳤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사는 동안은 대부분의 가사는 엄마의 몫이였기에, 생활이 아닌 일탈로 여겨져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더욱이 서울집의 부엌은 엄마의 공간을 빌려쓴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 마음에 드는 그릇을 꺼낼라치면 "아아, 그거 설거지하기 힘드니까 쓰지말고 여기다 해!"라면서 번번히 엄마의 제재가 들어왔다. 엄마는 성격상 조리 중간 중간 계속해서 싱크대며 주변을 정리해야하고, 밥 먹고 나면 일어나서 바로 설거지를 해야하는데 내가 꾸물거리면 핀잔을 주며 "네가 요리를 하고나면 주방이 엉망이 된다니까" 라면서 나의 조리의 즐거움이나 맛있는 음식을 음미할 시간을 단박에 앗아가셨다. 그렇다보니 엄마의 의뢰(?)가 있지 않는 한 부엌에 서서 무언가를 하는 일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부엌에서의 즐거움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일본 야림집의 부엌, 창문이 있을 곳엔 레시피가 붙어있다.


그렇게 20여년을 살았을까.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나는 일본에서 첫 자취생활을 시작했고 코로나와 공생하는 지금, 나는 서울에서 도쿄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자취를 해본 경험이 없으니 비교대상은 없지만 지금의 야림집은  절대적으로 내 마음에 드는 공간이다. 부엌과 방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크게 마음에 든다(혼자 살아보니 내가 찐으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입증됐다). 그밖에도 건물의 가장 끝집이라 창이 두개인 점, 베란다 앞으로 전철이 지나 적적함을 달래주는 것 등 마음에 드는 구석이 많아 시나브로 정을 붙인 집이다. 내가 살던 서울하숙집은 부엌에 창이 나있어 앞으로 산과 공원이 보였지만, 지금의 집은 창이 없어 약간 어두운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일까.




혼자라서 불안한 마음, 혼자라도 평온한 마음


스믈스믈 누울 자리를 찾던 코로나19는 2월 언저리부터 대놓고 우리의 곁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에 양 다리를 걸치고 있는 내게 두 나라의 정세는 나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이슈 중에 하나다. 3월 5일, 아베 신조 총리가 한국에서의 입국에 대한 강화조치를 발표했을 때, 나는 부리나케 일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특유의 돌려말하기식 화법의 일환으로 '자숙'이라는 용어를 채택, 차츰 도쿄의 문을 바깥에서부터 걸어 잠그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장벽을 세우고 있다. 더욱이 확진자는 늘어만 가는데 좀처럼 검사는 해주질 않으니 결국 옆집 친구(그렇다, 리터럴리 옆에 친구가 산다)는 내게 집 열쇠를 맡기고 무리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돌아갈 생각이 애초에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그런 나도 흔들리게 할 만큼 무섭다. 표면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놓인 뽈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내게 그나마 집에 갈 수 있을 때 돌아가라고 했다. '서울 돌아가면 뭐가 다를까?'라고 물었을 때 뽈은 내게 '글쎄, 그래도 가족과 친구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그런데 웬걸, 그 답장을 본 후 나는 '글쎄..'라는 말부터 튀어나왔다. '친구라면 여기도 있는 걸, 여기에선 혼자 집에서 조용히 작업도 그럭저럭 할 수 있을 것 같고' 점점 안 가고싶은 마음이 더 강하다는 걸 스스로 감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확신을 줄 타인의 말이 필요한 건 별 수 없나보다. 어지러운 마음과 두려움을 섞어 친구 E에게 연락을 하자,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야림이 서울에 온다면 만날 수 있어 기쁘지만, 와서 갇혀있는 기분만 들고 가족들로 스트레스를 받을 게 뻔하니 거기에 있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는 아주 털털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다, 돌아가고싶지 않았다. 안도했다. 그 후 나는 평온을 되찾고 어떤 날에는 종이를 만들고, 어떤 날에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또 다른 날에는 동네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했다. 더 이상 잠만 자러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라 이 공간 안에서 충실히 솔직하고 단단한 사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이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작정이다.


네 명의 식구가 옹기종기 같은 그릇에 숟가락을 담가먹던 서울집은 통상 우리가 떠올리는 '가족의 끈끈한 정'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살면서 어쩌면 더 이상 부모의 취향이나 생활양식에 영향을 받지 않고 야림이라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중심을 세우게 됐고 서울에서 이따금씩 마주하는 거짓된 순간들, 나를 철저히 숨기던 행동들은 많이 사라졌다. 나만의 리듬과 태도가 지켜지지 않는 그곳을 내가 함부로 하숙집이라고 칭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당연히 나는 가족들을 사랑하고 서울을 사랑하고, 모두가 함께 있는 그 순간이 애틋하고 뭉클하다. 소중하다. 그렇지만 그건, 나답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와는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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