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과 부모님집 사이
2020년 4월 12일
날씨: 맑음, 바람
기록자: 동그라미
현재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김포 한강신도시에 위치한 아파트. 코로나19로 독일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공식적으로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사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내겐 '부모님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바이마르에서 기숙사 싱글 아파트먼트(원룸)를 얻어 처음 자취생활을 해보기 전까지, 평생을 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니까. 그런데 한 번 내 공간이랄만 한 것을 가져본 다음에는, 사람 마음이 그 경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렸을 때 친구를 맘껏 집에 초대하거나 친한 친구네에 놀러 간 적이 별로 없다. 늘 집안 출입에 대해 일종의 결재를 올리듯 아빠께는 하루 이상 먼저, 엄마께는 엄격한 질문에 답하며 허락을 맡아야 했다. 노는 건 즉흥적인 욕구인데 그걸 미리 계획해야 하다니! 까다로운 절차가 곤혹스러워 하굣길에 친구들이 '오늘은 너희 집 놀러 가자' 말하면 그냥 거절을 했다. 학교와 직장을 서울로 다니면서 하루 이동 시간이 3~4시간이 되어도 김포살이를 고수하는 것, 지금도 여전히 암묵적인 통금이 존재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아빠, 엄마는 늘 ‘잠은 제때 집에서 자는 것’이라고 못이 박히게 말씀하셨다. 생활이 서울에 있는 경기도민으로서 말하건대, 그건 나이를 먹어갈수록 여러 의미 있는 경험과 관계를 배제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러다, 독일에서 처음 내가 구입했고 사용하는 물건으로만 가득 채워진 공간에 혼자 살아보게 된 것이다. 내 집은 내가 치우고 쓸고 닦는 만큼만 깨끗하고 내가 부지런히 장을 봐놓는 만큼만 먹을 것이 있는 적적한 곳이기도 하지만, 거기서 나와 친구들의 출입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그렇게도 좋았다. 누군가를 불러 잠자리와 먹거리를 내 마음껏 제공할 수 있는 자유. 원한다면 컴포트 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 (그렇다고 실제로 오밤중 파티를 대단히 즐긴 것도 아니다. 내겐 그 자유를 가졌느냐가 중요했다.)
이따금씩 잠시 한국에 들어올 때면 우리집은 굉장히 좁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평생 자라온 ‘우리집’은, 철저히 아빠 엄마의 철칙과 선택이 녹아있는 '부모님집'이더라는 걸.
문턱 높은 집 그 안에서의 부모님은, 공부할 시간 아끼라며 자식들에게 설거지 한 번 시키지 않는 분들이셨다. 집안에 먼지 티끌 하나 없고, 물건이 있던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살겠는 결벽증의 소유자들이시면서도 여러 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 해외에 있는 두 자녀의 물건은 조금도 버리지 않으셨다. 내가 오래간 정리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아 짐처럼 쌓여 있는 물건 일체를 항상 다 끌고 다니신 거다. 지난 이십 년간 아파트 면적은 조금씩 작아졌건만 내가 느끼는 집의 모습은 그래서 거의 그대로다.
이 집. 가족을 끔찍이 여기는 아빠와 엄마만의 질서가 이 공간을 강력하게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밖에서야 어떤 사람이건, 십 대일 때나 지금이나, 이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두 사람의 딸이 된다. 과거의 나들이 내 방에 쌓아놓은 노트, 책, 연습장, 문구류, 이제는 입을 수 없는 옷 더미에서 구체적인 현재의 나는 좀처럼 내 자리를 찾지 못한다. 그런데 동시에, 여기서 난 부모의 사랑이 골골이 새겨진, 어떤 영속적인 내 자리를 확인한다.
아참. 그사이 뉴스가 있다면, 3월 말, 우리 오빠도 미국에서 귀국했다. 이미 아노미 상태인 곳에서 의료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안고 계속 있을 이유가 없었던 거다. LA에서 박사 논문 학기를 보내고 있는 오빠는 원래 6월에 성대한 졸업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를 기념해 가족들 다 같이 캘리포니아 여행을 하면 좋겠다며 작년 가을에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놓았건만, 이것도 모두 수포가 되었다. 지난 2월부터 오빠가 코로나 관련해 마스크 항상 쓰고 다니라는 잔소리와 독일 출국을 재고하란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면 솔직히 건강염려증 같아 귓등으로 들었음을 고백하겠다(미안!). 헌데 이제는 그가 예고한 모든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설마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전 세계에 펼쳐지고 있다.
오빠는 미국에서 이미 열흘 격리를 하다 왔지만 그사이 공항을 통과해야 했기에 한국에 온 이후 지금까지 방에만 있다. 코 아래와 턱에 수염까지 기르면서. 그를 픽업했던 엄마도 덩달아 일주일 이상 집에만 계셨다. 공항에서 엄마는 오래간만에 만난 아들에게 멀찍이 떨어져서 손을 흔드는 것으로 포옹을 대신했다.
우리 남매가 유학을 하게 되면서 집에 네 식구가 모두 모여있는 때는 이제 흔치 않다. 코로나 19 덕분에 온 가족이 모이게 되다니,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아파트 평수가 작고 네 사람 모두 자기 삶이 뚜렷한 성인이 되어버린지라 집에 넷이 다 있을 때면 아무래도 집이 터질 것만 같다. 대화가 많아져서가 아니고 각자 필요로 하는 개인 시공간이 겹쳐서. 벽이 얇아서 오빠나 내가 신이 나서 연인과 통화하는 내용들이 옆방 또는 거실에서 주무시는 아빠에게 어름어름 들리고 만다. 혼자 살 때는 집안일 척척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설거지와 빨랫거리를 은근히, 부모에게 맡겨버린다. 엄마는 내가 보이기만 하면 막무가내로 본인 볼 일을 보러 같이 나가자고 한다.
나는 자꾸만 제 몸보다 작은 어미 아비 새들에게 길러지는, 둥지만 한 뻐꾸기를 떠올린다. 나는 언제까지 이 둥지에서 살아갈 것인가. 일단 더 살아야한다면, 이젠 내가 만든 질서도 여기 있어야겠다. 투표날에는 대청소를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