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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입니다 Apr 10. 2020

지갑은 배곯아도 식탁은 차려야지

시간 로또 당첨자의 삼시한끼 런던편

2020년 4월 10일 금요일
날씨 : 맑음. 봄 기운이 완연한.
기록자 : 뽈

얻은 것이 있다면 시간이다. 모든 걸 앗아간 록다운이 자비롭게도 남겨준, 유일한 선물.
그런데 너무 많이 줬다. 시간이 지나치게 많아서 낭비가 쉽다. 물론 낭비한대도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이가 없으니 죄책감도 없다. 처음엔 반갑게 생각하려 애썼다. 이토록 긴 휴식기를 가져본 전례가 없으니까.

야야,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그간 일하느라 미뤄둔 독서도 양껏 하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실컷 보고 기타도 자가장장 치는 거야. 생산적인 활동으로 채워가다 보면 시간도 지루할 틈 없이 흘러가지 않겠어?
 


응, 않겠어.
동굴에서 나온 직후 며칠은 시도했다. 문제는 내가 활자며 움직이는 사진이며 아름다운 멜로디며 하는 것들을 소화해내지 못하더라는 것. 준비되지 못한 나약한 몸에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욱여넣었더니 생산은커녕 급체해서, 다시 동굴로 기어들어와 뻗었다. 


다음날부턴 생산에 대한 욕심을 거뒀다. 아주 가끔 몇 줄의 문장을 읽고, 그날 유독 와닿는 곡을 몇 차례 반복 재생하는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때인 줄 모르고 일어나 어느 때인 줄 모르고 가만히 앉아있거나 누웠다. 애초에 시계도 없을 뿐더러 시계가 있더라도 볼 필요가 없으니. 그저 햇살의 고도와 하늘의 빛깔만으로 하루의 시작과 정점과 마무리를 가만가만 짐작해가며.


그러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해의 그림자가 내 방 창턱 오른쪽 2/3 지점에 이르면 허기가 진다는 것. 그 시각은 어김없이 오후 세 시라는 것. 그럼 아래층 부엌에 내려가서 그릇에 우유를 부어 들고 방으로 올라왔다. 상자째로 쟁여둔 시리얼을 대강 말아서 창가에 앉아 먹었다. 그 정도 곡기면 종일 누워있는데 드는 에너지를 보충하기에 충분했다.


영국 사십니까? 제발 켈로그 크런치넛 그래놀라 드세요. 초콜릿과 헤이즐넛 맛으로요.


여느 때처럼 세 시에 우유를 꺼내려 냉장고를 열었는데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버터 발라 구워 먹겠다며 야심 차게 사뒀던 새송이버섯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양파도 이미 물렀고, 샐러드 채소는 갈색 여물이 됐다. 한편 냉동칸은 썰어서 소분해놓은 호박이며 마늘, 파, 고추 등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 서랍엔 플랏메이트가 떠날 때 넘긴 향신료와 허브까지 떠안은 각종 양념류가 가득하다. 아, 그렇지. 생산적인 시간을 보낼 스스로를 응원하며 사재기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구해다 오기로 꽉꽉 채운 오만가지 재료가 있었지. 잊고 있었지.

이렇게 열심히 얼려놓고는


그날 썩고 물러터진 것들을 몽땅 내다 버리고 흔적을 닦으며 작은 다짐을 했다. 한 끼는 제대로 먹을 것. 휴무일에 틈틈이 장을 봐 냉장고를 채우고 어설픈 음식을 해 먹던 지난날의 즐거움을 되찾을 것. 하루 중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정신 차릴 것. 


록다운 3주 차. 다짐대로 매일 삼시한끼를 만들어 먹고 있다. 소시지와 양파, 김치로 시작해 두부와 버섯으로 마무리한 찌개를 끓이고, 춘장에 고기와 채소를 튀기듯 볶아 흰 쌀밥 위에 끼얹은 뒤 달걀을 올려 먹는다. 오븐에 넣고 구운 냉동 피자에 반주 겸 낮술로 캔맥주를 꿀꺽이고, 마늘과 페페론치노 향을 입은 올리브 오일에 파스타를 달달 볶아 먹는다. 비장의 무기 카레(비밀인데 나는 카레왕임.)는 넉넉히 만들어도 두 끼면 끝난다. 


왼쪽부터 야매 부대찌개와 야매 짜장밥
그리고 정통 카레


요알못의 역량 부족에 따른 협소한 메뉴 스펙트럼을 탈피하고자 요리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는데 오, 재미를 붙였다. 국경과 언어를 가리지 않는 유튜브 세계 속엔 좋은 선생이 넘친다. 랜선 은사들을 흉내내는 동안 해 먹는 음식이 조금씩 다양해진다. 웨지 모양으로 썰은 어린 감자와 채소를 볶다가 연어 필렛을 굽고 간장 소스로 조려내는 연어 스테이크도, 대파 기름을 내 굴소스를 휘릭 발라낸 청경채 볶음도, 다진 소고기와 채소를 푹 끓이다시피 해서 만든 매콤한 토마토소스에 리본 모양 파스타와 치즈를 넣어 떠먹는 볼로네제도 만들어 본다.
 

횟감을 팔길래 사다가 칼로 직접 떠 먹어도 봤습니다. 연어 귀신이라.


음식을 만들어 먹는 행위는, 그러니까 재료들을 흐르는 물에 씻어서 다듬고 썰고 접시에 옮겨놓고 순서에 따라 차례로 익히고 기다리고 접시에 담아내고 비우고 더운 물로 그릇과 도구를 깨끗이 씻고 정리를 마치기까지의 과정은 꽤나 큰 편안함을 준다. 특히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절대 못 하는 나 같은 애에게 이 일은 잡생각을 지연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거니와 생산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였지, 어설픈 맛마저 즐거웠던 건. 잃었던 입맛과 함께 잊었던 사실도 되찾는 중이다. 스스로 내는 결과물에 좀처럼 만족하는 일이 없는 내가 왠지 조금은 관대해지는 시간이라 심신 안정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느릿하지만 끊임없이 분주하기에 시간이야 말할 것도 없이 금세 흐르고.

1인분인데요.




카레왕에서 볼로네 제왕으로 거듭날 생각입니다만.


요즘엔 알리오 올리오를 다시 파고 있는데 매번 복불복.


그래서, 오늘의 삼시한끼는 뭐냐고?

안물안궁이겠지만 말해드릴 생각이다.
버터와 대파, 생파슬리를 넣고 파스타 만들 거거든요. 맛있겠지. 

입맛 다시고 있는 거 알아요. 다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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