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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림 Jul 26. 2020

리틀포레스트

아주심기가 가능하다면 

날짜 : 2020년 7월 26일 일요일

날씨 : 언제까지 장마?

기록자 : 야림



2주 전인가, 그때는 그 한 주가 너무 너무 고됐다. 입에 담아서 다시 상기하고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외면해서도 안되는 일들이 연달아 터졌기 때문이었다. 


이따금씩 우리 문어 친구들이 '오늘도 그나마 얼마 남아있지도 않았던 인류애가 바닥나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세상이 너무 절박해서 '희망회로' 내지는 '이상향 회로' 같은 게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괜찮은 남자사람은 있을 거고, 아직 인류애는 지켜져야한다'고, 나는 그렇게 끊임없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연달아 터지는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을 다루고 제대로 처리해야할 사람들의 태도에 나 또한 점차 화가 나기 시작했고 하나 하나 책임을 물어서 전체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끼는 동시에, 수많은 여성들이 이렇게나 고통받고 있을 때 이 일련의 (혹은 긴 역사 속 여러 형태로 일어나왔던) 일들에 대하여 가십처럼 잠시 말을 섞는 나의 남자사람친구들을 보며 조금씩 '그렇게 믿고싶음'의 마음을 거두고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남자사람친구가 아니더라도 나이가 지긋한 여성들도, 어떨 땐 '심지어' 동년배 여성들도 때때로 나를 '좋지않은 의미로' 놀라게 했다. 자세히 쓸 수는 없으니 여기서 각설하지만, 여하튼 그 한 주 동안은 그냥 내 안에 화가 많았고 심히 우울했다. 공교롭게도 이사를 앞둔 탓에 집안을 가득 메운 박스들도 나를 심난하게 하는 데에 한몫했겠지.


박스가 작은 거지 결코 짐이 많은 게 아니야 얘드라


그래서일까 짐을 싸다가도, 학교에 나가 작업을 하고 선생님과 면담을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덜컥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끈화끈 열이 났다. 어떤 날은 결국 참지 못하고 덜컥 찬장에 들어있던 위스키를 꺼내다가 펑펑 울면서 마셨다. 많이 마셨고 많이 울었다. 그럼에도 취하지 못했다. 그렇게 잠이 들었고 그래도 한결 나은 다음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문어친구들이 소위 말하는 '인류애'가 내 안에서 한꺼번에 사라졌다. 숙취 없이 한결 나은 기분을 갖는 대신 나는 인류애를 잃은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3년 가까이 정을 붙이고 살아온 집을 떠나 새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코로나는 끝날 기미가 안보이고 졸업학년이니 작업은 해야하는데 학교시설을 자유롭게 쓰지도 못하는데다 일도 시작했으니 여러모로 여기서 모든 걸 해나가기엔 더 이상 힘들겠다는 판단이었다. 역에서 멀어지는 대신 넓은 집으로 가서 기분전환도 하고 무기력함에서 빠져나오자, 그런 결단이었던 것 같다.




깜찍한 창문이 있는 집이다

새집을 보러간 날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매일 밤 제발 그 집으로 이사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여담이지만 일본은 입주 전 심사과정이 있다. 제대로 월세를 부담할 형편이 되는지, 체납된 적은 없는지, HOXY 외국인인지(...), 외국인이라면 보증인이 제대로된 사람인지 등등을 다각도로 검토하여 이 집을 임차할지 결정하는 심사다. 대신 시작이 까다로운 만큼 한 번 들어가면 큰 문제가 없는 이상 건물주, 집주인에 의해 쫓겨날 일은 일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다. 한국과는 이부분이 다른 점이다) 다행히 무사히 통과하여 이사가 결정됐다! 


그 길로 길고 긴 이삿짐 정리를 무사히 마치고 새집에 입성해 약 일주일이 흘렀다. 오자마자 수도에 물이 새서 세탁기를 돌릴 수가 없고, 집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어 아무 생각없이 창문을 열어둔 채 샤워를 하다가 너무나도 커다란.. 바선생과 조우하기도 했다. 정원에는 초등학생 때 이후로 본적도 없는 것 같은 콩벌레가, 비가 오면 자주 지렁이가 땅 속에서 기어나온다. 벌레랑 친숙해지자고 매일 아침 되뇌이지만 좀처럼 만날 때마다 몸이 배배 꼬인다. (휴. 힘을 줘 얘들아.) 

그리고 집 옆옆에 작은 식료품점이 있어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살 수 있고 길건너에는 아기자기한 킷사텐이 있어 언제든 커피를 마시러 갈 수 있다.




하시모토의 새로운 공간에 뿌리내린 나는 지난 몇주간 느낀 공허함, 무력함을 꼬꼬비 씻어내고 있다. 근무지가 멀어서 출퇴근길이 조금 더 고되졌고 주변에 식당이 전무해서 외식은 꿈꾸기 어렵지만 이미 집안에서의 삶이 충분히 풍요롭고 여유롭다. 역에서 멀어진 만큼 인적이 드물어 조용하고, 밤에는 밤답게 깜깜하다. 오랜만에 식재료를 사다 나를 위해 요리를 했고, 사람들을 초대해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요즘이다. 꿈에 그리던 정원이 생겼고, 정원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 작업도구도 주문했다. 시간을 들여 조금씩 나의 집을 채워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 오고난 후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다 잠시 카페에 갔을 때의 일이다. 왠일인지 오랜만에 S로부터 전화가 왔다. 갸우뚱하며 전화를 받아보니 대뜸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어"라고 말했다. 지금 있는 집 계약 갱신일이 다가왔는데 때마침 2학기 수업도 온라인으로 대체된다는 공지사항을 전달받은 참이고 마땅히 졸업 후 어떻게 해야할지 정하지 못한 상황이니 이것도 찬스인가 싶어서 겸사겸사 일단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받은 순간에는 너무 당황해서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잘 안나지만, 그 후로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맞는 선택이고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 네가 돌아가기 전까지 맘껏 같이 놀자고 말했다. 


처음 새집에 온 날, 집 선물을 받았다. 잊을 수 없는 선물이 될.


그후로 '있을 곳'에 대해 생각한다. (일본어로는 居場所(いばしょ,이바쇼)라고 하고, 말 그대로 있을 곳이라는 뜻이다) 내가 가진 인류애가 전멸하기 전에는, ENFJ로서 내가 가진 정과 사랑을 있는 힘껏 퍼부을 수 있는 대상을 만나는 것을 내 삶의 가장 큰 꿈으로 삼아왔다. 형태와 상관없이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충만하게 살 수 있을 거란 믿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에 앞서 '내가 있을 곳'을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뽈의 지붕이 되어주고, 동그라미의 피난처가 되어주는 맥시멀리스트의 아지트 

점점 더 하시모토에 대한 애착을 심어주는 귀여운 창문의 집

자기만의 방을 갖게하고 적당한 속박과 적당한 자유를 선사하는 런던

혹은 K의 곁 

... 



평생을 들여 찾아야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온전히 나답게 있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내가 지금 있는 '이곳'과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S가 있을 곳을 찾아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한국판 <리틀포레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되뇌인다. 주인공 혜원이 불현듯 고향에 돌아와 주린 배를 채우고서 다시 서울에 돌아가 고향에서의 아주심기를 준비하는 장면이. 언젠가 나도 하시모토에 아주심기를 할 수 있을까. 아주심기를 하고 나면, 내게서 사라졌던 인류애는 과연 내곁에 돌아와줄까나? 



싱상한 토마토와 옥수수, 여름을 알리는 자연의 산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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