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졸업해 헤어진 6학년이었던 정진이는 그야말로 무학의 통찰이 빛나는 아이였다. 책에 대한 호불호가 강했고, 웬만한 책은 시시하다며 대충 읽었다고 당당히 말하곤 했다. 책의 표지와 머리말만 보고 어느 정도 몰입해서 읽을지 결정하는 아이이니, 책이란 본래 매력도만큼의 집중 밖에 할 수 없음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책을 대충 읽고 잘 읽고의 여부를 떠나 나름의 통찰이 있어 토론할 때면 늘 촌철살인같은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4학년 수인이는 어떤 책이든 곧잘 읽는다. 좋아하든 아니든 해야 하는 일에 대한 긴장감과 책임감이 강해 뭐든 잘 읽고 잘 이해해 온다. 어머니 또한 계획안이 나가는 즉시 책을 구입해 늘 넉넉한 시간이 있어 편히 읽었다고 전해주신다. 그러나 수인이는 수업 중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하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타고난 내향성이 있는 어린이이다. 대신 누구나 그렇하듯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 표현은 하고 있으며 늘 수업이 즐겁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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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도서는 최소 일주일 전에 준비해 주셔야 아이가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늘 해마다 새학기면 독서교실 부모님에게 보내드리는 많은 공지사항 중 한줄이다. 책 한 권을 읽는데는 2,3시간 길어야 3,4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어린이도 생각과 감정이 있는 한 인격이기 때문에 읽을 수 있는 컨디션일 때, 읽고 싶을 때 읽을 권리가 있다. 그러려면 최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있어야 스스로 조절해서 읽을 수 있다. 수업이라는 목적을 위해 읽을 책을 정해준다는 자체가 어쩌면 하나의 의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읽을 시간의 선택만이라도 어린이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 도서 준비의 역할을 맡은 부모님들에게 부탁을 계속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독서교실을 열고 나서 만난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이런 나의 부탁을 잘 들어주셨다. 거의 모든 어린이들이 빠짐없이 책을 읽고 수업에 오고 있다. 이해도의 여부와 상관없이 부모님에게, 어린이들에게 감사해하고 있다. 간혹 읽지 못하는 경우는 부모님도 사람이라 도서 준비를 잊으셨거나 가정에 크고작은 일이 있는 경우다. 혹은 정진이처럼 진작에 손에 책을 들고 있지만 매력도가 떨어지기에 스스로 대충 읽기나 안 읽기를 선택한 경우다. 팀원을 고려하지만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다소 어려운 책은 잘 읽을래야 읽을 수 없기도 하다.
모둠독서수업을 하는 독서교사들의 고민 중 한가지는 이런 도서 준비에 대한 이야기다. 학부모님이 도서를 잘 준비해주시지 않거나 준비해 주셔도 어린이가 읽고 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반 이상이 도서를 읽어오지 못할 때 수업의 난감함은 많이 겪어봐서 충분히 이해한다. 단 한 아이만 읽지 못해도 그 아이가 마음에 걸린다. 수업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제대로 참여하지 못해 어린이 자신이 불편하거나 부끄럽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마치게 된다.
이 고민을 가진 수많은 독서교사들의 질문에 답해주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같을지 모르지만 나는 늘 한 가지 답밖에 하지 못했다. 독서교사와 수업에 대한 신뢰를 쌓으면 학부모님들도 최선을 다해 도서를 준비해 주신다는 이야기이다. 나도 오랫동안 그 문제로 힘들었기에 내가 찾은 나름의 방법을 알려드리면서도 찝찝하다. 교사와 수업에 대한 신뢰를 쌓으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장 수업을 해야 하는 교사들에게 그게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로 들리는지 잘 알기에 지금은 질문을 받아도 잘 대답하지 못한다.
어느 날은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가 이에 대한 명쾌해 보이는 듯한 조언을 읽었다. 책을 읽어오지 않은 아이는 문앞에서 일단 격리한단다. 다른 어린이들이 교실에서 수업하고 있을 때 그 어린이는 문 앞 작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도록 한단다. 그리고 갈 때 교재를 쥐어주고 숙제로 풀어오라고 하면 다음부터는 읽어온다고 했다. 만약 3회 이상 읽어오지 않으면 퇴회시킨다는 조언이 아무렇지 않게 그것은 마치 진리라는 듯 쓰여 있었다.
감정에 손상을 입히는 일종의 충격 요법이니 얼마간 효과는 있을 수 있겠다. 퇴회하고 싶지 않으면 엄마나 아빠가 억지로라도 읽힐테니 언뜻 읽어오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다. 이러한 해결방법을 조언의 형태로 전해주는 걸 처음 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해결법에는 늘 그럴듯한 근거가 따라 붙는다. 책을 읽어오지 않는 어린이는 모둠원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 책을 읽지 않으면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격리당한 채로 읽게 하거나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는 걸 학부모와 미리 합의를 하면 문제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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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독서지도를 시작하며 자의반 타의반으로 잠시 수강했던 강의가 있었다. 그런데 강사님은 종종 몇몇 수강생들의 상황과 형편에 도무지 해 올 수 없는 독특한 과제를 내 주셨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일주일간 발발 동동 구르며 결석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는 것이 나을 듯 하여 수업을 들으러 갔다. 성인이었지만 수강생이었기에 과제 못한 꾸지람 정도는 감당하려 했다. 그러나 그 강사는 꾸지람을 넘어 이런 사람들 때문에 강사하기 싫다며 면박을 주며 잔소리를 이어갔다. 앉아 있기에는 모욕감이 컸고 일어서 나가기에는 용기가 없었다. 나는 그 다음 강의부터 가지 않았다. 아니, 갈수가 없었다.
모둠 수업에 책을 읽어오지 않는 아이. 모둠원에 대한 피해는 차치하고 어른과 어른의 협의로 인하여 어느공간에서 배제당한 어린이의 마음은 굳이 내 과거사를 떠올리지 않아도 충분히 알겠다. 옆에서 친구들의 수업하는 소리를 들으며, 멀리서나마 수업하는 어린이들의 곁눈질을 받으며 책을 읽는 아이는 뇌에는 억지로 글자를 넣는 척 했겠지만 가슴에는 상처가 담겼을지 모른다. 90분이라는 그 긴 시간을 수업에 참여하지 못한채 집으로 돌아가며 다음 수업에는 책을 잘 읽어오겠다고 결심했다면 그건 자신의 성장을 위한 다부진 각오가 아닌 오기였거나 분노였을 것이다.
언뜻 타당해 보인다. '책을 읽어와야 수업에 참여할 수 있어.'라는 말도, '책을 읽어와야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거야.' 라는 말도 어린이 본인과 모둠원 모두를 위한 제법 합리적인 말로 들린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차별당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책을 읽고 오지 않아 수업에서 배제되었다면 어린이는 엄연히 차별을 당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차별을 배운 것이기도 하다. 어린이가 자라 결정권을 갖게 되는 나이가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대로 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어디에서든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 굳이 인권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머리로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건을 내세운 동등은 동등이 아니다. 반드시 책을 읽어와야 친구들과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말이 논리에 맞다면, 읽어오지 않고도 줄거리를 듣고 토론에 잘 참여하는 정진이의 수업 시간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해석될 수 있다.
책을 읽어온 아이만 토론에 참여할 권리를 주려는 것은 모둠원들에게 도움이 될 때에만 존재를 인정해 주려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늘 잘 읽고도 말하기를 즐기지 않아 있는 듯 없는 듯한 수인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 읽었지만 이해를 못한 어린이도 수업에서 배제되어야 하는걸까? 결국 잘 읽고 잘 이해하는 완벽한 어린이만 참여하는 수업이라면 그 수업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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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5학년 승연이는 책을 읽어오지 않았다. 승연이가 못 읽을 수준의 책은 아니었고 책준비가 일찌감치 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날 수업은 정확한 줄거리 이해가 있어야 몇 가지 활동이 가능했다. 잠시 고민히다 줄거리는 물론 자유롭게 감상 표현도 가능한 협동 게임을 제안했다. 게임판에는 친구가 대답을 하지 못할 때에는 '괜찮아'라고 말해주라고 쓰여 있었다. 힌트 단어를 주어 줄거리 이해를 돕자는 나의 말에 어린이들은 너무도 적극적으로 안 읽어온 친구를 도왔다. 지난 나의 몇몇 행동들이 심히 부끄러워지는 어린이들의 어른 같은 모습들.
책 안 읽어온 어린이를 격리하라는 당당한 조언이 결국 차별을 가르치는 것임을 알면서 내가 감히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나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실수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참 많은 잔소리를 해댔다. 부모님은 너를 위해 책을 사 주셨고 선생님은 너를 위해 수업 준비를 했다는 어린이의 상황과 마음을 고려하지 않은 무지막지한 말을 폭언인줄 모르고 해댔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말로 쥐어주는 것들이 어린이들을 얼마나 숨막히게 하는지 가슴 깊이 모르지 않았을텐데 수업을 이끌어야 하는 나 자신만 생각했던 것이다.
독서교실은 개인의 사업장이다. 사업장은 영리추구가 목적이다. 교육비를 받는다. 교육비의 조건은 어린이의 성장과 변화이다. '책 안 읽어온 어린이'를 보고 안달나는 마음이 생겨 눈을 흘기거나 잔소리를 했던 내 마음을 새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읽어와야 토론할 수 있고 토론해야 어린이가 성장하고 그래야 교육비를 받으며 당당할 수 있다는 나 중심의 생각만을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 본심을 '너를 위한 것'이라는 그럴 듯한 말 따위로 포장하지는 않았을까.
가끔 내 모습이 못마땅할 때마다 나는 내 직업의 본분을 생각한다. 외과 의사 이국종 교수님은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저 의사의 본분이기에 어떤 상황의 환자든 치료하고 살리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독서교육의 목적, 독서교사의 본분은 무엇일까. 어린이가 독자로 성장하게 돕는 것이 가장 큰 임무가 아닐까 한다. 책을 읽어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어린이가 그것이 차별임을 인식했다면 책을 좋아하게 될리는 없다. 당연히 독자가 될수도 없다. 책은 자신에게 수치심을 심어준 것이라고 기억될테니 말이다.
동등함.
책을 읽고 토론하며 글쓰기를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어디서든 존재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 실수하거나 잘못했다면 동등한 대우를 받을 기회라도 얻는 것. 동등함이 먼저 있어야 책 앞에 평등할 기회도 있으니 이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어린이는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세상을 배운다. 수업의 편의와 어린이의 성장을 위해 했었던 나의 말과 행동이 부디 누군가를 차별해도 된다는 가르침은 아니었기를, 오늘도 이 못난 선생은 글 속에 숨어들며 나를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