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순간 미소가 지어지는 고흐의 〈첫걸음〉이라는 그림은 밀레의 그림을 모방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으려는 아기와 아기를 뒤에 살며시 잡고 있는 엄마, 그리고 일손도 내려놓고 아기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는 아빠의 모습은 주변 색채와 어우러져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그렸다는 이 그림을 본 동생 테오는 고흐가 그린 그림 중 최고라며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테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기에 태어날 조카를 기대하며 그린 그림이지만 안타깝게도 고흐는 조카를 보지 못하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기어다니던 아기가 세상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은 넘어질까 두 손으로 아이를 잡은 엄마와 그 아이가 마음껏 걸어올 수 있도록 두 팔을 넓게 벌린 아빠에게만 감동적인 건 아닐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제 3자의 시선에서도 충분히 벅차고 아름다우니 그건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생의 첫걸음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독서교실에 오는 어린이들 중에 가장 어린 연령은 아홉살이다. '열 살이면 세상을 알 만한 나이'라는 책 제목처럼 한 살 어린 아홉살도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아홉해의 삶의 냄새가 흠뻑 묻어있는 작은 사람이다. 내 눈에는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우쭈쭈 말투가 나올 때가 있지만 책 이야기를 나눌 때만큼은 그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대화를 한다.
준희도 아홉살에 독서교실에 왔다. 벨소리를 듣고 현관문을 활짝 열었지만 수줍어하며 문 앞에서 좀처럼 들어오지를 못했다. 두 언니들이 이미 다니고 있는 곳이었지만 준희에게는 새로운 세상일테니, 천천히 기다려주었다. 신발을 벗고 겨우 들어온 준희는 가려는 엄마를 보며 마치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을 보내는 듯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엄마가 가신 뒤 늘 그렇듯 나는 독서교실 구석구석을 소개해 주었다.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아 가방을 두게 한 뒤, 이미 와 있는 어린이들과 눈 인사 정도를 하게 했다. 오늘 몇 명의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것인지도 이야기를 하고 어린이책을 모아 책을 대여해 주는 독서방에 대해서도 안내해 주었다.
독서교실에 대해 언니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물어보며 긴장을 풀어주고 책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은근슬쩍 묻기도 했다.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기전 지면을 통해 간단히 알아보지만 늘 그렇듯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는 자리에서 더 깊은 소통이 되기에 한 번 더 묻는 것이다. ‘책 좋아해?’라는 아주 간단한 한마디로 시작하면 얼마든 오래 깊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또 책 이야기이다.
준희는 읽기 경험이 많지 않았다. 모든 가정이 그렇지는 않지만 세 자녀 이상의 가정에서는 아무래도 읽기라는 행위에 몸과 마음을 쓰기가 쉽지는 않다. 아이들 중 두 자녀 이상이 학교 가기 전의 나이라면 보호와 보육에만 힘쓰기에도 벅차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을 배우고 나서 비로소 시작되는 혼자 읽기의 시간을 많이 누려보지 못한 준희는 글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아장아장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했다. 소리내어 읽을 때도 글자를 물어보고 쓰는 과정에서도 모르거나 헷갈리면 슬쩍 나를 보면서 구원의 눈빛을 보냈고 그 때마다 나는 준희의 교재에 슬쩍 써서 알려주곤 했다.
준희 뿐 아니라 모든 어린이들이 내가 고른 함께 읽는 책을 넘어서 스스로 골라읽는 자기독서의 행복과 자유를 누리도록 책을 빌려주고는 한다. 처음 만난 날 준희에게 『내 멋대로 아빠뽑기』를 빌려주자 읽어보겠다며 흔쾌히 가져갔고 다음 주 책을 가져온 준희는 재미있었다며 만족해했다.
다니엘 페나크가 『소설처럼』에서 말한대로 ‘읽지 않은 권리’와 ‘읽다 멈출 권리’도 누리게 해 주는 것이 독자로 성장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읽다가 별로면 멈추어도 돼.’ ‘지금 가져가는 세 권 중에서 읽고 싶은 것만 읽고 와도 돼’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느 날은 가져간 그대로 들고 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정말 재밌었다면서 반납하기 전 나에게 말해주기도 하던 준희가 몇 달이 지나자 알아서 책을 빌리기 시작했다. 권하지 않을 땐 반납만 하고 슬며시 가던 준희였는데 독서교실에 오면 손씻기가 무섭게 독서방에 들어가 알아서빌리는 것이다.
어느 날인가는 병만이 동만이 만만이 시리즈를 한 권씩 빌려갔다. 읽기책을 처음 시작하는 어린이를 위해 나온 책으로 병만이와 동만이 형제, 그리고 강아지가 함께 살아가는 훈훈하고 재미난 이야기이다. 15권으로 나온 책은 작은 판형에 얇고 가벼운 페이퍼재질이라 한데모아두었어도 책장 한 구석에 쑥 들어가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한글을 배웠지만 문장을 홀로 많이 읽어본 경험이 적어 읽기 자체가 서툴고 더불어 이야기책 읽기의 경험도 많지 않아 동화의 재미를 느껴본 경험도 적은 준희에게 적절한 책인 것 같아 권해주었는데 재밌다면서 매주 한 권씩 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읽기가 서툴다고 읽기 공부를 하듯 책을 읽게 하거나, 읽기 능력만을 기준으로 책을 고르는 일은 위험하다. 재미도 의미도 찾지 못하는 글을 글자 읽기 공부를 위해 읽는다면 읽기의 지루함과 고통만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이야기책을 펼치기 전의 설렘이라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많이 느껴보고 경험해 본 어린이일수록 책읽기를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살면서 어느 한 시기의 과업으로 인해 잠시 책을 놓았어도 결국 다시 집어드는 사람은 어린 시절 읽었던 이야기의 재미를 알고 그 힘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혼자 읽기를 막 즐기기 시작하는 아홉살의 읽기는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것이다.
봄의 향긋함 속에서 만나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을의 냄새도 함께 느끼게 되었을 무렵의 준희는 그렇게 제법 자라 있었다. 독서방에서 혼자 책을 꺼내 펼쳐보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슬며시 다시 넣기도 하고 병만이 동만이 시리즈 뿐 아니라 조금 더 크고 두터운 책도 슬며시 꺼내는 준희를 보는 내 마음 또한 기쁘지 않을리가 없었으니 그 마음이 고흐의 〈첫걸음〉 속의 아버지 마음이 아니었을지 감히 상상해 본다.
어린이가 혼자 책을 꺼내들기 시작한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내딛는 어린 아기의 첫걸음처럼 긴장되면서도 설레는 일이다. 우리 삶이 그대로 펼쳐진 책 안에 몸과 마음을 온전히 맡긴 채 이야기를 읽는 읽은 이 삶을 더 폭넓게 만나 울고 웃으면서 마냥 좋을수만은 없는 삶 속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 귀하고 위대한 일을 시작하는 어린이들에게 나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다. 이야기속에 펼쳐진 다양한 삶을 만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에 그 용기를 낸 어린이들과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는 일은 어린이의 삶을 응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책을 돌려주며 어린이가 ‘선생님 이 책 정말 재밌었어요’라는 한마디에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며 ‘진짜,진짜? 선생님도 좋아하는 책인데!’라며 건네는 한 마디는 책 안으로 들어가 삶 걷기를 시작하는 어린이들에게 내가 보내는 소박하지만 최고의 찬사이다.
매년 3월이면 새로 만나는 아홉해의 숨을 품은 영혼들, 그 영혼들이 삶의 첫걸음을 더 용기있게 땔 수 있도록, 그리고 꼭 뚜벅뚜벅 잘 걸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내년에는 한 가지 더 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건 바로 처음 만난 어린이가 읽으면 행복해 할만한 책을 고르고 골라, 봉투에 고이 담아주는 일이다.
그 앞에는 이런 말을 담아보련다.
이야기책을 혼자 읽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 삶을 홀로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삶 걷기가 시작된 아홉살, 작은 사람 라온이에게 이 책을 건넵니다.
언제나 책과 함께 하기를,
언제나 뚜벅뚜벅 삶을 걸어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