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는 칭찬을 해 주면 안 돼요. 잘했다고 하면 정말 잘하는 줄 알고 긴장을 풀어요.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밤9시에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수업하기로 약속한 아이들과의 일정을 소화해내려면 어쩔 수 없이 밤까지 수업해야 했던 그 시절, 겨울이 깊어지는 밤, 늘 그랬듯 가로등에 의지해 아파트 동을 찾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터널처럼 느껴지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3초의 심호흡 후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지마자 느껴지는 무거운 공기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내 어깨를 더 짓눌렀다. 늘 그러했듯 애써 침착한 마음으로 아이가 머무는 방을 물어 터벅터벅 걸었다. 현관부터 아이방까지가 마치 끝이 안 보이는 너른 벌판같아 온 몸의 기운을 발에 실어 아이 방에 들어갔다.
보통 처음 수업가는 날이면,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체로 아이들은 초인종 소리가 들리면 나와서 인사를 한다. 그러나 호영이는 나오지 않았다. 문을 열어보니 몸집에 비해 다소 작아보이는 상을 펴고 앉아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나를 보자 가볍게 인사를 했지만 손은 문제집에 가 있었다. 한자 문제집을 다 풀고 자야 한다면서 급히 마무리하려는 모습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호영이 앞에 내가 앉는 것을 확인한 어머니는 문을 닫으며 말씀하셨다. 이 아이는 칭찬하는 순간 자만하니 절대 칭찬해주지 말라는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내 가슴에 무겁게 박혔다. 아이들의 부모가 내 부모처럼 느껴져 어렵던 이십대 중반의 나는 그저 공손하게 '네, 어머니'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지만 가슴 한 켠에서는 그 말을 계속 밀어내는 나를 느꼈다.
어린이들과의 첫 만남은 설렌다. 그렇기에 마냥 웃고 싶다. 우리 사이에는 즐거움을 더해줄 책이 있었다. 그러나 조명만 켜 둔 어두운 거실, 무거운 표정의 어머니와 칭찬하지 말라는 굳건한 당부, 엄숙한 분위기의 집에서 유일하게 밝은 불을 켜둔 방 안의 호영이와 나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다정한 대화조차 눈치가 보이는 무거운 분위기의 집안. 칭찬하지 말라는 당부는 거의 매주 이어졌고 1년간의 수업은 잊을 수 없는 무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제 막 1학년에 올라간 진희는 날마다 그림책을 서너권씩 읽었다. 읽어주면 한 두 권 듣는 둥 마는 둥하던 진희가 어느 날 갑자기 혼자 읽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한껏 들떠 계셨다. 여느때처럼 진희와 책 속 탐험을 마치고 나오는 나의 귀에 어머니는 속삭이셨다. 진희가 책읽기양이 늘었으니 칭찬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스티커도 좋고 다른 보상도 좋다고 하셨다. 어떤 말로 칭찬해야 하는지 대사까지 알려주셨다. 어머니가 하시는 칭찬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며 내가 함께 동조해 주기를 바라셨다. 그 부탁 역시 거의 매주 이어졌다.
어린이가 책을 스스로 읽으면 칭찬해 달라는 요구는 지금도 종종 듣고 있다. 보상의 효과 여부를 떠나 책읽기가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니라는 철학이 있는 나는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멈칫한다. 진지하게 나의 독서지도 철학을 다시 말씀드릴 것인지, 어머니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니 잠시나마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릴지.
읽고 생각하고 나누는 시간, 각자가 하나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오롯하게 참여하고 있는 자리에서 과연 어떤 것이 칭찬의 대상이고 어떤 것이 질책이 대상이어야 할까. 말하지 않는 어린이도, 말이 많은 어린이도, 쓰기를 좋아하는 어린이도, 다소 싫어하는 어린이도..타고난 모양과 크기대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타인과 함께 해야하는 모둠 수업이기에 규칙을 정할 수는 있어도, 함부로 칭찬과 질책의 기준을 정하기는 어렵다.
읽는 일도 쓰는 일도 말하는 일도, 그리고 생각하고 소통하는 일도, 결국 우리가 이 불안한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어린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는데 칭찬 스티커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20년 내내 고민했지만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읽지 않는 것과 쓰지 못하는 것이 질책의 대상이 될 때 그 행위의 의미는 훼손되고 만다.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기에 읽는다고 쉽게 칭찬할 수도..안 읽는다고 혼내달라는 요구를 수용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담긴 그릇이 다르고 불리는 이름이 다를 뿐 우리는 어디서든 '하나의 존재'로 마주한다. 내 눈 앞에 어린이가 있다면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건 어린이와 함께 이 세상에 하나의 고유하고 고귀한 영혼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본분이다. 부모님의 요구가 어린이의 참성장에 위배된다고 느낄 때 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건 선생으로서의 본분이다. 사교육자라면 요구하는대로 해 줘야하지 않느냐는 다소 무례한 부모를 거부하는 건 인권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본분이다.
내 교육관에 옳다고 주장할 순 없다. 부모님의 요구가 틀리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다. 다만 사람이기에 내 생각과 다른 방식을 어린이들에게 적용할 수 없을 뿐이다. 그리고 내 선택에 책임지기 위해 내 교육관을 끊임없이 점검하고발전시키기 위해 애쓴다. 읽고 쓰며 만들어진 생각대로 행하는 것, 그것은 읽는 자로서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준을 두고 의도적으로 칭찬하거나 질책하지 않아도 어린이들은 성장한다. 읽고 쓰는 일의 거룩함을 알고 소중히 여기는 자가 곁에 머물며 그 세계를 함께 탐험해 주기만 하면 된다. 성과에 대한 의도적 칭찬, 성과를 이루게 하기 위한 의도적 외면은 어린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실례이다. 책 한 권 읽었다고 100원을 주고, 많이 읽길 바라며 갑지가 책장에 몇 십권을 채우는 건 책에 대한 모독이다.
타고난 모양대로, 존재하는 모양대로 인정받고 사랑받은 어린이만이 자기안의 힘을 끌어올려 이 세상에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다. 어른이 주는만큼 자랄 것이라고 믿는 건 어른들의 오해라는 것이다. 남이 주는대로가 아닌, 자기의 동력을 발견하여 자란 어린이는 그 힘을 다음 세대에 전할 힘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어린이만이 희망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칼릴 지브란의 글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아들 딸이다.
아이들은 당신을 거쳐서 왔지만 당신한테서 온 것은 아니다.
비록 지금 당신이 아이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그들이 당신의 소유는 아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지만 당신의 생각까지 줄 수는 없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당신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는 있지만 영혼의 집까지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니까.
당신은 꿈에서조차 갈 수 없는 곳에.
당신이 아이들처럼 되려고 애써도 좋으나 아이들을 당신처럼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삶이란 결코 뒤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어제에 머물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