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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쌤 Nov 30. 2020

책앞의 평등

아빠는 뭐든 주워오시길 좋아했다. 나무조각, 판자, 플라스틱 등 누군가 버린 물건을 보고 쓸 만하다 싶으면 무조건 주워다오셨다. 손재주가 많으셨던 아빠의 손을 거치면 쓰레기처럼 느껴지던 것들이 제법 그럴듯한 물건이 되었다. 주말이면 하루종일 앉으셔서 뚝딱이며 물건을 만들어 내던 아빠는 어느날인가는 다시 손보지 않아도 되는 정말 그럴 듯한 것을 주워오셨다. 그건 작은 집의 책장 윗쪽을 가득 채우게 된 두꺼운 문학전집.


바래어 잿빛에 가까워진 남색 커버는 딱딱했고 제법 두터웠다. 책등의 글자들은 작고 흐릿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새로운 물건?이었지만 꺼내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빠도 저학년이었던 내가 읽을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셨는지 유리문이 달린 책장의 윗칸들에 꽂아두셨다. 책 사이로 삐져나온 빨간 책끈들은 간혹 나를 유혹했지만 그저 책장 앞을 가끔 새초롬히 지나갈 뿐이었다.


제법 무거워 보이는 책을 꺼내 펼친 사람은 언니였다. 적어도 중고등이상은 되어야 읽을 수 있었던 책으로 기억하는 그 책을 5학년이었던 언니는 참 잘도 읽었다. 깨알 같은 글씨에 누런 종이, 넘겨도 넘겨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얇은 종이장 뭉치, 게다가 성경처럼 한장 한장 쉬이 넘길 수 없을 듯 심오해 보이는 글 속으로 심취하는 언니의 모습이 신기했다. 명작 그림책 몇 권을 겨우 읽을 수 있었던 당시의 나는 간혹 책에 대해 물었지만 언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

휴강 기간, 책을 대여해주기 위해 간혹 개방해 두었던 독서교실에 4학년 민진이가 헐레벌떡 들어온다. 늘 그렇듯 쫑알대며 손을 씻고는 빌려갔던 책들을 바닥에 늘어놓는다. 그리곤 한 권을 못 가져왔다면서 덧붙인다.



"선생님, -맞아 언니 상담소- 책 있잖아요. 그거 우리 언니가 신나게 읽고 있어요. 그래서 못 가져 왔어요. 어쩌죠?"

"어쩌긴, 다음에 가져오면 되지. 오늘 빌려갈 책 찾아볼까?"



민진이의 언니는 5학년이다. 2학년 때 1년 나와 독서수업을 했다. 저학년 때 헤어져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민진이를 통해 종종 소식을 듣는다. 책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와 '책'을 가운데 두고 만났던 아이여서 책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내심 궁금하다. 그렇다고 한들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민진이는 이르듯이 종종 말한다.



"선생님, 우리 언니 책 안 읽어요. 만날 스마트폰 하느라고 바빠요. 친구랑 노느라고 들어오지도 않아요."



그러던 민진이의 언니가 민진이가 빌려간 책을 그리도 재미있게 읽고 있다니 기쁜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내 표정에 생기가 돌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언니의 모습이 좋았던 것일까. 그날따라 민진이는 유독 5,6학년 수준의 이야기책을 골랐다. 바쁜 부모님로 인해 일찍이 독립적이 되어 나이보다 성숙한 민진이가 못 읽을 책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은 유독 언니가 무척 재미있게 읽고 있다는 책과 비슷한 소재, 비슷한 두께의 책만 골랐다.


아무말 없이 지켜본 나는 민진이가 고른 책을 가방에 넣어주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 책 이야기를 나누고 민진이는 돌아갔다. 언니에게 읽어보라고 권할지, 그저 언니 눈에 띄게 둘지 민진이 집까지 따라가는 건 아니니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왠지 언니와 함께 읽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흐뭇함이 스며들었다.


지난 주에 만난 5학년 서진이는 평소 잘 읽지 않던 소재를 꺼내며 그런 책들이 있느냐고 물었다. 몇 권 있지 않기도 했지만 평소 관심사가 아니었던 책을 갑자기 찾는 이유가 궁금해 물으니 엄마가 읽으신다고 라온독서교실 독서방에서 찾아보라고 했단다. 어린이책이지만 역사서라 관심이 있으셨거나 아이와 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많지 않아 빌려주지 못한 안타까움에 우선 책을 주문해 두었다.


자기가 빌려간 책을 다른 가족이 본다는 말을 민진이에게만 들은 건 아니다. 서진이처럼 다른 가족의 요청으로 그 책이 있느냐고 묻는 어린이들도 종종 있다.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이건 우리 엄마가, 이건 내 동생이 좋아하는 책이라며 이미 가족들이 읽은 책을 들고 가는 어린이도 있다. 가족 생각까지 못하는 어린이에게는 옆에게 은근히 부추기기도 한다. "이 책 동생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아? 빌려가 볼래?" 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끄덕이며 가방에 넣는다. "와, 이거 우리 엄마가 보면 좋겠다. 우리 엄마도 사차원인데"라는 말과 함께 '사차원 엄마'라는 책을 집어든 정민이에게 책을 권하니 엄마가 볼 책을 빌려가도 되냐며 의문과 반가움을 함께 표현한 적도 있다.


독서방은 내가 운영하는 독서교실의 작은 입구방에 꾸며놓은 책대여방이다. 수업에 오는 어린이들에게 책을 무료로 대여해준다. 매주 5권이지만 책을 씹어먹듯 읽는 어린이들에게는 더 가져가도록 허용한다. 원래 잘 읽는 어린이는 책을 잘 고르지만 그렇지 못해 책장 앞을 서성이기만 하는 어린이에게는 이 책 저 책 꺼내며 재밌다고, 읽어보라고 호들갑을 떨며 은근슬쩍 가방에 넣어준다.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는 공부에 지친 고학년 몇몇의 어린이를 독서방으로 유도하기 위한 시도도 꾸준히 한다.


지난 주에는 과학책 코너를 새로 정돈했다. 지식책을 좋아하지 않으면 손도 대지 않는 어린이들도 꺼내들게 하고 싶은 마음에 기존의 배치와는 조금 다르게 해 보았다. 물화생지 학문적 분류와 비슷한 듯 아닌 듯, 어린이들이 꺼내고 싶고 읽고 싶게 만드는 배치를 고민하고 실행했다. 정리하다보니 더 재미있고 편하게 집어들만한 책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적지 않은 양의 새 책도 들였다.


독서 수업과 준비에 힘을 쏟다보면 그 작은 방 하나 관리가 생각보다 어렵다. 어느 날은 수업만으로도 지쳐 흐물거리는 미역같은 몸 누이기 바빠 어린이들이 반납해 놓고 간 책이 한가득 쌓여 있어도 정돈을 못한다. 새로 산 책 박스를 며칠이나 못 뜯는 경우도 허다하다. 머리는 열심히 굴릴지언정 지금은 그 정도 밖에 못하는데도 적지 않은 에너지와 비용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독서방의 책을 구입하고 정돈하는 일, 여느 동네책방처럼 다양하고 신선한 배치, 책 뿐 아니라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읽을거리들, 그 책들을 빌려가도록 권유하는 일은 물론이고 그 책들과 한바탕 놀 수 있는 방법 등을 꾸준히 연구하고 고민하고 있다. 책장 정리의 기준을 새로 마련하다보니 원래도 좁던 방이 더 좁아져 고민은 늘어가지만 우선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나씩 해 나가고 있다.


누가 시키는 일도 아니고 독서교실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쏟아 하는 이유가 있다. 그건 내 안에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인데 그 믿음은 '모든 인간이 존중 받으며 평등해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책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먼저 자유함을 얻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삶은 평등하지 않다. 인생의 수많은 진리 중 하나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미친듯 일하며 열심히 살아도 벗어나기 힘든 가난은 몸소 겪어 충분히 알고 있다. 가난이 아니더라도 이세상 곳곳에서 수많은 이유들로 사람들은 극과 극의 삶 속에 놓여있다. 질병을 갖고 태어나 평생 고통을 받기도 하고, 인종이 달라 차별당하고 외모 때문에, 학벌 때문에, 나이, 성별 때문에 여러 불합리를 겪는다. 신은 평등하다거나 노력하면 복이 온다는 등 희망적인 메시지들이 위로해 주어도 어떠한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누구나 평등하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책은 사람의 인식을 변화시킨다. 정신을 자유하게 한다. 얼토당토 않은 이유들로 이 세상이 누군가의 삶을 끊임없이 압박해도 책을 읽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유롭기에 투쟁할지언정 상처입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그것이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이고, 책 앞에 누구나 평등해야 하는 이유이다. 도서관이 책을 빌려가는 이에게 지위도, 신분도 묻지 않는 이유는 책읽기만큼은 누구에게나 열린 자유여야 하며 그것만이 이 시대의 희망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험한 세상으로 본격적인 발을 내딛지 않은 어린이들은 어른만큼 불평등을 겪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앞에서 이미 평등을 잃는 상황을 나는 자주 마주한다. 부모의 참독서의 인식이 부족하다면 그 어린이는 이미 책앞에 평등하지 못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다소 어렵거나, 부모가 지나치게 바빠서 도서관을 데려가주지 못하거나 책 한 권을 오롯이 읽어낼 시간도 없이 바쁜 어린이라면 그 어린이들은 이미 책앞에 자유를 잃은 것이다. 늘 내 마음을 아프다못해 저리게 하는 사실들이다.


그 어린이들이 독서방에서만큼은 모두가 대등하게 책을 읽고 빌릴 권리를 누리게 하고 싶다. 책을 들고 가면 어차피 가족들 모두에게 보여질테니 그 가족이 동생이든 언니오빠든 부모님이든 조부모님이든 함께 읽는다면 나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책 앞의 평등을 조금 더 실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상식적인 자본주의 논리로 따지자면 '수업료 내는 수업 받는 어린이에게만' 빌려주는 것이 맞겠지만 그 돈 때문에 따뜻한 밥 한끼조차 먹기 힘들었던 시절을 살아본 내가 그 수업료를 안 냈다는 이유로 아이의 가족들이 읽을 책을 빌려가지 못하게 한다면 그건 곧 과거의 나를 기만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

젋은 시절 소설을 즐겨 읽으셨다는 아빠는, 언니와 나의 이름도 인상 깊었던 소설의 등장 인물 이름에서 따와 지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삽십대 후반의 나이에 겪은 사고로 평생 아프게 사셨던 아빠는 삶이 팍팍해지기 시작하며 손에서 책을 놓으셨다. 열두살 나이에 어른 문학을 읽으며 삶을 통달한 듯한 말을 하던 언니도 아빠대신 일찍감치 생계전선에 뛰어들면서 책을 놓았다.


낡고 찢어진 명작 그림책 몇 권을 뒤적였을 뿐 책과 깊은 조우를 해 보지 못했던 나는 그 두꺼운 책을 끼고 읽는 언니의 모습을 낯설어하고 때론 괜히 질투까지 했었다. 그런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가족 중 유일하게 읽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또 그것을 넘어 어린이들에게 읽는 삶을 전하고 있는 나는 늘 가슴 한 켠에 작은 돌덩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산다. 그렇게 좋아하던 책을 놓을 수 밖에 없었던 가족들이 누릴 읽기의 행복을 혼자만 누리는 것 같은데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인 것 같다.


내 어떤 행위가 죄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속죄가 필요한 순간들은 있다. 그림책이라도 읽어드렸으면 좋았을 테지만 아빠는 이미 곁에 안 계신다. 몇십년을 이미 책으로부터 멀어진 언니에게 책을 권하는 일도 쉽지는 않다. 은근슬쩍 곁에 몇 권을 가져다 둘 뿐이다. 그 불편하고도 미안한 마음을 나는 어린이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 같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지간에 책읽기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어린이가 나에게 온다면 그 어린이들에게 책읽을 자유, 책을 고를 권리를 주고 싶다.




책을 반납하러 오는 날 민진이는 뭐라고 말할까?


이번에는 언니 뿐 아니라 동생도, 엄마도 재미있게 읽었노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가난이 우리 가족의 책읽는 권리를 빼앗았듯 이유는 다를지언정 책읽는 권리를 빼앗겼을지도 모를 가족들이 라온 어린이들의 가족일 수 있다. 아이가 빌려가는 책이, 그 가족들에게까지 책이 닿았으면 좋겠다. 결국 책을 읽었기에 정신이 자유로울 수 있었음을 인식하는 날을 그들이 맞이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힘을 타인에게 또 전해주어 타인의 삶에도 자유를 선사한다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책 앞에서만큼은 평등했고, 그래서 행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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