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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귤 Dec 10. 2020

자마엘프나의 소년을 그리며, 인샬라

낮잠을 잔 게 실수였다. 시차적응 실패다. 장거리 비행에 지친 탓인지, 리아드[1]를 통해 들어오는 나른한 햇볕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그 탓에 예약해놓았던 메디나 가이드투어 시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36분이었다. 애매한 시간이다. 


지금 가봤자 투어는 막바지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누워만 있기엔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주섬주섬 외투를 걸쳤다. 내일이면 마라케시를 떠나야했다.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이 도시를 눈에 담고 싶었다. 밖으로 나왔지만 딱히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릴없이 골목을 지나 자마엘프나 광장으로 향했다. 자마엘프나는 가장 ‘모로코스러운’ 곳이었다. 광장 한 쪽에서는 터번을 두른 아저씨가 코브라를 앞에 둔 채 피리를 불고 있었고, 그 옆에는 원숭이와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는 아저씨가 있었다. 반대편에는 중지에서부터 손등까지 길게 올라오는 헤나를 그려주는 아주머니들로 가득했다. 나는 호객꾼에게 잡히지 않도록 목표물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목표물은 3디르함의 오렌지주스. 이곳에서는 단돈 천원으로 갓 짜낸 오렌지 주스 한 컵을 마실 수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입도 심심했기에 오렌지 주스를 들고 공원 벤치에 앉았다. 핫산을 만난 곳은 그 벤치에서였다. 


 “니하오 니하오. 곤니찌와”


 여행을 하며 지겹게 듣던 말이다. 동양인은 다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인 줄 아는거다. 평소 같으면 눈길도 주지 않고 외면했겠지만,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터라 괜히 대꾸를 하고 싶어졌다. 


 “응 뭐라고? 나 너희 나라 말 못해.”


 어라. 그 길로 지나칠 줄 알았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사과를 받았다. 한국인이라는 나의 말에 그는 자신이 본 한국 드라마 이름을 줄줄 읊었다. 자신을 핫산이라 부르라 했다. 앳된 얼굴을 보니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다. 특유의 악센트가 있긴 했지만, 영어 실력이 제법이었다. 그는 프랑스어와 베르베르어, 그리고 스페인어도 조금 할 줄 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관광객들에게 노출된 탓이리라. 내가 심심해 보였는지, 핫산은 메디나 투어를 자청했다. 아, 이게 블로그에서 봤던 사기인가. 의심부터 들었다. 십중팔구 마지막에 돈을 요구하니 절대 현지인을 따라가지 말라는 말도 떠올랐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핫산은 “프렌드~ 잇츠 포유~”를 반복했다. 거절할 핑계를 대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막상 거절한대도 내게 별다른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혹여 돈을 요구하더라도 투어를 놓친 차에 나쁘지 않은 거래일 듯 했다. 그렇게 그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오케이! 아이 윌 팔로우 유.”


해가 지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핫산의 발은 바삐 움직였다. 혼자서 돌아다니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던 골목들을 지났다. 로컬 골목은 혼돈 그 자체였다. 어디서 잡아 온지도 모를 생선과, 죽은 닭들과, 이름 모를 야채들이 한데 뒤엉켜 판매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오토바이와 수레들이 지나다녔다. 알 수 없는 무언의 질서가 있는 건지, 혼란 속에서 핫산은 나를 요리조리 잘도 끌고 다녔다. 나는 핫산에게 젤레바를 사고 싶다고 말했다. 모로코에 도착한 첫 날부터 눈 여겨 보고 있던 전통 의상이었다. 우리는 각종 조명을 파는 시장과 향신료와 따진[2]그릇을 파는 시장을 지나 그의 이복 형제 알리가 운영하는 젤레바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에 발을 내딛자마자 알리는 민트티를 따라주었다. 손님이 오면 무조건 민트티를 대접하는 게 이 곳 전통이랬다. 첫째 부인의 아들인 알리와 셋째 부인의 아들인 또 다른 알리가 함께 운영하는 이 가게. 이 곳에서 생각보다 저렴하게 초록색 젤레바를 구입했다. 귀족의 색이라고 했다. 따갑던 해가 사라지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떠나려는 나를 보며 핫산이 쭈뼛쭈뼛 묻는다. 얼마를 줄 거냐고. 나는 예상했으면서도 짐짓 물었다. 


“우리 친구라며!” 


그는 사기꾼답지 않게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자신에게는 동생 다섯이 있으며, 엄마가 아프다고. 나는 안다. 나에게는 모로코가 현실을 피해 온 이국적인 땅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이 곳은 치열한 생존터임을. 사실 핫산에게 어느 정도의 투어 비용을 지불해도 괜찮았다. 메디나의 이곳 저곳을 누비던 그의 발걸음에 약간의 고마움도 느끼던 차였다. 그가 없었으면 놓쳤을 모로코의 풍경이었다. 다만 한 시간의 고마움과 지금의 불편함 사이에서 얼마를 꺼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디르함 몇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핫산은 그 돈을 세어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인샬라.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들의 신과 내가 믿는 신은 다르지만, 핫산에게 대답했다.


 “인샬라. 신의 가호가 있기를.”




[1] 모로코식 전통가옥

[2] 토기 그릇 위에 돔이나 원뿔 모양의 뚜껑을 씌워 놓은 모양의 냄비. 이 냄비를 사용해 만드는 모로코 전통의 국물요리 역시 따진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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