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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귤 Dec 22. 2020

나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어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서 만난 할머니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아도 너-무 많다. 특기는 일 벌이기, 취미는 다음 도전할 일 찾기. 잘 못하는 것도 있다. 바로 천천히 걷기다. 과거의 내가 펼쳐 놓은 일들을 끝맺으려 종종걸음으로 서두르던 게 습관으로 굳어졌다. 그러다 보니 당장 일 년 후, 혹은 십 년 후 나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때쯤이면 또 어떤 바람이 불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50년 후의 나의 모습을 묻는다면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일흔의 나는 글을 쓰고 있을 거다. 기왕이면 내 소유의 서점에서. 서점에는 정원이라고 말하기에는 작은 풀밭이 딸려 있을 거다. 풀밭 위 흔들의자에 앉아 글을 쓰는 나. 내가 그리는 완벽한 노후의 모습이다. 서점 2층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낭독회를 열 거다. 그 일을 경제적 활동과는 무관하게 하고 싶다. 그 말인즉슨, 젊은 날의 나는 돈을 무지 많이 벌어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2019년 2월 4일, 내가 바라던 이상향의 할머니를 만났다. 내 꿈이 그저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운명적 만남은 파리 뷔세리 거리에 위치한 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서 이루어졌다. 셰익스피어 & 컴퍼니는 어니스트 허밍웨이, 제임스 조이스, 스콧 피츠제럴드 등 당대에 이름을 날린 문인들이 자주 찾던 곳이다. ‘영화 좀 봤다’ 하는 사람들이면 모를 수 없는 서점이기도 하다. <비포선셋>에서 에단 호크가 출판 기념 사인회를 하다 줄리 델피를 재회한 장소가 바로 이 곳이다. 이외에도 <미드나잇 인 파리>, <줄리 앤 줄리아> 등에도 등장하는 이 서점은 빼놓을 수 없는 파리의 관광지 중 하나다.


셰익스피어 & 컴퍼니. 내부는 생각보다 크다.


서점 내부는 아늑하고 꼬불꼬불했다. 모험하듯 서점 이곳저곳을 누볐다. 발걸음은 2층의 어느 공간에서 멈췄다. 초등학교 교실 하나 정도 되어 보이는 공간에는 둥그렇게 소파들이 놓여 있었다. 세월을 말하듯 색이 바랜 소파는 무척이나 푹신해 보였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보이는 창문 바로 앞에는 짙은 체리색의 책상이 있었다. 그 위에는 브리타 정수기와 두 개의 커피포트, 각종 차 종류와 비스킷이 담긴 틴 케이스가 올려져 있었다. 책상 앞에는 행동에 여유가 엿보이는 백발의 할머니가 서 계셨다. 


 “네 시부터 티 타임과 시 낭독회가 있을 예정이에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답니다.”


시계를 보니 네 시 오 분 전이었다.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인 곳에서 시 낭독회라니! 낭만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할머니와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매주 일요일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 낭독회가 열린다고 했다. 호기심에 찬 여행객들은 둥글게 모여 앉았다. 자리가 모자란 탓에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할머니는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찻잔을 건네고 비스킷을 나눠주었다. 


할머니는 자신을 화가이자 시인으로 소개했다. 당신의 그림을 보여주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가 가진 인생의 조각들도 엿볼 수 있었다. 젊은 날 미국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배웠던 시절의 이야기와 아들딸에 대한 은근한 자랑 등이었다. 그녀는 서른 명 남짓 모인 사람들 중 유일한 동양인인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한국, 이라는 대답에 자신의 한국 학생도 정말 똑똑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했다. 


스몰 토크가 끝나자 당신이 쓴 시를 낭독했다. 시와 곁들이는 따뜻한 차와 달콤한 비스킷. 그야말로 완벽한 조합이었다. 그 순간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다음으로 시를 낭송해볼 사람이 있나요? 영어여도, 영어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마음속으로 수십 번 손을 올렸다 내렸다 고민하는 동안, 스페인에서 온 한 여행객이 가운데로 나와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역시 너무 많은 고민은 기회를 놓치게 한다. 쫄보는 낯선 언어로 된 시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저 할머니 나이가 되면 한국에서 서점을 열거야. 매일 1층에서 글을 쓰고, 일주일에 한 번 낭독회를 열 거야. 맛있는 비스킷을 항상 쟁여 둬야지.’ 하지만 그보다 머지않은 미래, 다시 파리에 와 시를 낭송할 일이 있기를 바랐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화재가 났다. 그 날 창문을 통해 본 성당이 노트르담 성당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복원을 마친다 해도 이전과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없을 테다. 올해 10월에는 코로나 19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긴 셰익스피어 & 컴퍼니가 경영난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른 곳이 넘는 나라의 팬들이 셰익스피어 & 컴퍼니를 돕기 위해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했다고 한다. 덕분에 서점은 책을 배송하느라 바쁘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언제쯤 다시 파리에서 차와 시를 즐길 수 있을까. 또렷한 목소리로 시를 낭독하던 할머니는 건강하실까. 어느 질문에도 대답을 할 수 없어 마음 아픈 20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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