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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귤 Dec 22. 2020

에스프레소가 '쓴 커피' 라고요?

로마 타짜도로에서 만난 '찐' 에스프레소 이야기

고백하지만, 과거의 나는 ‘얼죽아’였다. 손이 꽁꽁 어는 겨울에도 어김없이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외치는 사람 중 하나였다는 말이다. 6개월의 교환학생 기간, 그리운 ‘한국의 맛’ 중 최고봉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얼음을 넣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해도 한국식 ‘아아’ 대신 뜨거운 커피에 얼음 서너 개가 동동 띄워진 ‘미지근한 커피’가 내 앞에 놓일 때마다 한국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커피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만난 에스프레소는 ‘얼죽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에스프레소가 ‘쓰게 마시는 커피’라는 건 한국인의 착각이다. 이탈리아에서는 갓 내린 에스프레소 샷에 스틱 설탕 한 봉지를 통째로 털어 넣는 게 정석이다. 이때 설탕이 뿌려진 크레마의 모습을 보면 잘 내려진 샷을 구분할 수 있다. 설탕이 크레마 위에 잠시 떠있다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고, 다시 탄탄한 크레마가 설탕 자국을 덮는다면 신선한 원두로 적절히 추출된 샷이다. 반면 설탕을 넣는 순간 바로 가라앉는다면 원두의 상태가 좋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투어 가이드님께 들은 정보다.) 다리가 아파서 무작정 들어간 첫 카페는 실패였다. 설탕은 기대가 무색하게 넣자마자 가라앉아버렸다. 그래도 이탈리아까지 왔는데,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만나지 못한다면 아쉬울 것 같았다. 찾아보니 마침 다음 날 일정인 판테온 근처에 ‘로마 3대 커피’ 중 하나인 타짜 도로(Tazza d’Oro)가 있었다. 


타짜 도로는 중력이 약한 장소 같았다. 카페는 북적였고, 발이 바닥에서 1cm 정도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손님들은 바(bar)에 한 팔을 걸치고 일어선 채로 커피를 마셨다. 바리스타는 주문서를 보고 빠르게 샷을 내리고는 손님에게 조그마한 에스프레소 잔을 건넸다. 그들은 에스프레소를 한 두 모금 만에 비우고는 자리를 떴다. 한국의 카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빠른 회전율이었다. 어느새 줄은 빠르게 줄어 내 앞에 에스프레소 잔이 놓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설탕을 털어 넣었다. 1초간 시간이 멈춘 듯 하얀 설탕이 크레마 표면에 정지되어 있다가, 샷 내부에 자석이라도 생긴 듯 스르르 빨려 들어갔다.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오 마이 갓. 온갖 풍미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밀도 높은 고소함과 감칠맛. 달콤함과 씁쓸함이었다. 아메리카노를 가리켜 ‘양말 빤 물’이라고 부르는 유럽인들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한 모금이었다. 홀짝홀짝 몇 모금만에 에스프레소는 끝이 났다. 적은 양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다고 한 잔을 더 마시면 그날 밤은 뜬 눈으로 지새울 게 뻔했다. 에스프레소를 입에 털어 넣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현지인들처럼 나도 쿨한 척 카페를 떠났다. 


하지만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내내 커피 향이 입가를 맴돌았다. 그래, 이탈리아에 언제 다시 올 줄 알고! 하루의 잠은 맛있는 커피 한 잔과 바꿀 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결국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타짜 도로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역시 환상의 맛! 게다가 한 잔에 1.1유로(한화 1400원)밖에 하지 않는 에스프레소의 가격은 나를 황홀하게 했다. 카페인 과다 섭취로 두 잔 이상의 커피는 마시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도 그 맛을 느끼고 싶어 커피 원두를 구매했다. 선물용으로도 몇 개 더 챙겼다. 


 얼마 전 의외의 장소에서 타짜 도로와 재회했다. 용산 아이파크 몰에서 친구들을 만나 식사 메뉴를 고를 때였다. 매장 내 식당과 카페를 안내하는 키오스크에는 붉은 배경에 씨를 뿌리고 있는 여성의 실루엣이 있는 그림이 있었다. 타짜 도로의 로고였다. 타짜 도로가 한국에도 입점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감격의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다니! 하지만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대신 이탈리아에서 1.1유로에 맛봤던 에스프레소 한 잔이 5000원이 되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핑계였다. 완벽했던 에스프레소의 기억에 굳이 새로운 시도를 덧바르고 싶지 않았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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