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만 쓰다 느닷없이 수필이라니
솔직히 말해야겠다. 나는 수필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늘 소설만 써왔기 때문에 수필은 꽤나 생소한 분야고,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수필/에세이 카테고리에 들어가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수필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호미'가, 영감을 준 작품 목록을 뽑으면 어김없이 '방망이 깎는 노인'을 비롯한 수필 몇 개가 들어갈 정도다. 그러니 이 생소함은 막 생산자 이름표를 단 프로 소비자가 겪는 곤혹스러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다 똑같은 글인데 뭐가 그렇게 다르겠어? 라며 반문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쓰는 입장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정합성이 허락하는 한 여러 편에 걸쳐 느긋하게 기승전결을 진행해도 되는 소설과 달리 수필은 한 편 한 편이 완결성을 가져야 한다. 소설이 작품 속 캐릭터의 입을 빌려 간접적으로 주제를 전달한다면 수필은 작가가 직접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섯 정도까지는 공통점이 없다. 마치 같은 대학교의 다른 전공을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꽤나 당황스럽지만 의외로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학부 시절에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 2학년 때 노동법 강의를 청강한 적이 있었다.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주변에 법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수업을 엄청 재미있게 하시는 교수님이 계셔'라는 친구의 말에 이끌렸으며, 착실하게 침몰 중이던 전공에 대한 흥미를 되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교양 수업이었던 만큼 쉽게 따라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조금은 있었고.
하지만 그 기대는 간단히 깨졌다. 채 5분도 버티지 못했던 것 같다.
정글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셨던 정안봉 선생님이 그러셨던가,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지만 너는 아니라고. 중학교 수준의 법 지식이 전부였던 공대생에게 직업안정법이니 산업안전보건법이니 하는 것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듣던 대로 탁월한 강의력을 자랑하시는 교수님 덕분에 강의실을 박차고 나가는 일은 없었지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수업이 어떠냐고 묻는 친구에게 한국어이긴 한 것 같다고 대답할 정도였을까.
그렇지만 한 달쯤 지나자 한국어 수업이 법대 수업으로 들리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수업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험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마냥 즐겁게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때 배운 노동법 지식은 이후 아르바이트를 할 때 희미한 준법정신을 자랑하시던 고용주님을 위해 써먹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많은 것들을 가져다준 수업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몇 년. 졸업까지만 버티자던 공대생이 제발 졸업만은 안된다며 총장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졸업유예생이 될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막 수필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인 지금, 청강 신청서를 들고 처음 법대 건물에 들어가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새로운 도전으로 겪을 시행착오가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도전이 가져다 줄 경험과 미래를 기대하는 중이다.
새로운 도전에는 필연적으로 시행착오가 뒤따른다. 때로는 새로움보다도 거대한 시행착오에 열정이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서지 않고 계속 도전한다면 언젠가는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이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 프로 생산자 이름표를 다는 그날까지, 막막한 기분으로 강의실에 앉아있던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글을 써 내려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