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밝은 햇빛에 눈을 서서히 떴다. 내가 이전에 입어본 적이 없는 브랜드의 몸에 잘 맞춰진 검은색 양복에 단정히 다려진 하얀색 와이셔츠가 몸으로 느껴졌다. 또다시 필름이 끊겼나 보다. 그런데 옷은 내가 입어본 적이 없는 옷인데. 너무나 단정함에 놀랐다. 우선 여기는 분명히 집은 아니었다. 해는 이미 머리 위에 있었고 나는 벤치에서 눈을 떴고 사람들은 이미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몸은 무겁고 머리는 아팠다. 무리를 싸쥐고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바삐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멍하니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많이 아프신가 봐. 병원에 가보시지 않아도 될까?"
처음 보는 아가씨였다. 미인에 부티나는 옷에 반말이지만 친절함이 말투에 배어 있었다. 이제 슬슬 집에 가야 할거 같았다. 반짝거리는 구두가 낯설었다.
"커피나 한잔 하시면서 쉴까?"
"고마워."
문득 거리가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아가씨는 나를 데리고 작은 카페에 데리고 가서 나는 제일 좋아하지만 비싸서 시키지도 못했던 시그니쳐 싱글 원두로 내린 완벽한 드립 커피를 시켰다. 오늘은 기분이 좋다.
'그래 여기서 커피를 처음 알았지.'
그리고 내가 바리스타였던 것을 기억했다. 몸은 싸구려 머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멋지게 차려입은 정장 차림으로 순식간에 원두를 갈고 물을 데우고 에스프레소로 커피를 내렸다. 어느샌가 로스팅 기계에서 샘플로 원두를 꺼내어 상태를 확인했다. 잘 구워진 원두를 보는 순간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커피를 마신 우리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말이 없었다. 다만 옆에서 가만히 앉아서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갑자기 옆자리 할머니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아가씨는 나에게 그 할머니가 기억나지 않냐고 물었다. 지난번에 네가 그 할머니를 모시고 중고 냉장고를 사러 같이 다녀오지 않았냐고. 기억나지 않냐고 했다. 나는 그 중고 가게에서 진상 진상을 떨었다고 한다. 말이 없던 아가씨는 갑자기 내가 자랑스럽다는 듯 수다쟁이가 되었다. 저녁까지 우리는 계속 버스를 탔다. 해가지고 나는 피곤해졌고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대고 잠이 들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푹 잔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다시 벤치에서 눈을 떴다. 다시 해는 머리 위에 있었고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그 아가씨의 무릎에서 머리를 기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미친 듯이 놀랐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너무 배고파서 그녀에게 맛있는 초밥을 먹으러 가지고 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작은 초밥집에 갔다. 초밥집 사장님은 그녀를 보더니 너무 반가워하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작은 초밥집에서 이렇게 많은 음식이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아침 겸 점심쯤에 시작된 음식들은 저녁이 되도록 계속 나왔다. 거나하게 배부르고 취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녀는 갈 곳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지하의 소극장. 익숙하게 표를 끊지도 않고 그녀는 나를 데리고 극장에 들어갔다. 관객은 코로나로 없었다. 불은 꺼지고 기다리는데 배우는 나오지 않았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킨 나는 무대로 올라갔다.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나도 모르게 시작된 대사들. 감정들. 너무나 벅차서 공연하는 중반부터는 계속 눈물이 났다. 그녀는 박수를 쳤고 나는 너무나 피곤해서 그냥 무대에서 누웠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깊은 잠.
서늘한 기운에 눈을 떴다. 처음 보는 병원 벤치. 나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또 누워있었다. 그녀는 어느샌가 깔끔한 까만색 정장으로 갈아입어 있었다.
병원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10월 20일 06시 25분'
"잘 주무셨어요?"
3일 만에 처음으로 존댓말을 하는 그녀가 어색했다.
"이제 그만 가시죠."
"정말 마시고 싶었던 거, 먹고 싶었던 거, 해보고 싶었던 거... 다 해봤으니. 그만 가시죠"
그녀는 고급 다이어리에서 내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김만기. 10월 18일 1시 30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