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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레린 Clairene Dec 05. 2024

어릴 적 내 꿈은 현재 진행 중

어릴 적 그림에 소질이 있던 나는 전국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여러 번 탔다. 지금도 드레스를 입은 채 상을 받으러 나가서 기뻤던 한 편, 긴장하여 손을 떨며 상을 받았던 어린 내 모습이 생각난다. 미술학원 선생님이나 학교 선생님은 나에게 미대에 진학하라고 권유하셨다. 나는 내가 어른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미래의 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매일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에게 그림이란 그리고 싶을 때 가끔 하면 되는 힐링용 활동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내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했다. “미술은 취미로만 할 거예요.”라고. 


사실, 내 꿈은 어릴 적부터 명확했다. 엄마 말씀에 따르면, 나는 유치원에 다니던 7살 때부터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곤 했었단다. 그 당시 아이들이 주로 꿈꾸던 직업은 ‘대통령’이었는데, 나는 왜 ‘사업가’라는 거창한(?) 꿈을 가지게 된 것일까?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 당시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다가 다시 직장생활을 하고 계셨는데, 나중에 사업과 자선사업을 하겠다는 아버지 말씀을 들으며, 사업가가 무엇을 하는지 대략 알게 되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명절 때마다 집으로 찾아오는 부하 직원들에게 존경스럽지만 함께 어울려 즐기는 리더이자, 가족들에게는 다정다감한, 이상적인 어른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존경한 인물은 바로 아버지였다. 나도 아버지처럼 멋진 리더이자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사업가가 된 나의 모습을 쓱쓱 그려놓고, 미래에 카리스마 넘치는 사장이 된 나를 상상하곤 했다. 중역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자신감 넘치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 내 미래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던 부모님처럼, 나도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자선사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눈물을 흘리며 읽었던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나 '성냥팔이 소녀'처럼 가난으로 인하여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재단을 만들고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어려운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겠다고 막연하게나마 결심했었다.


생성형 AI로 어릴 때 꾸었던 내 미래의 꿈을 제작함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학년 초에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짧은 단발에 키가 나만큼 크지만 매우 호리호리했던 여자아이로, 이름이 정미였다. 나는 학급 임원으로서 전학 온 친구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말도 걸어주고 학교도 안내해 줬다. 얌전했던 정미는 점심시간만 되면 교실에서 사라지곤 했다. 이상하게 여긴 나는 그 아이를 좇아가 보았고, 정미가 건물의 구석진 계단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미야, 여기서 뭐 해?”
“어… 도시락을 안 가져와서….”
정미는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놀랍게도 정미는 고아원에 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정미가 왜 그리 호리호리하고 기운이 없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매일 점심을 거르니 얼마나 배가 고프고 속이 상했을까? 새로운 친구는 성냥팔이 소녀나 네로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아파왔다. 내가 있는 반에 밥을 못 먹는 친구는 없길 바랐다. 매일 배고팠을 그 마른 친구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완벽한 해결방법이 있었다. 해답은 완벽한 우리 엄마. 항상 최고의 반찬으로 정성 가득한 도시락을 싸주시는 엄마에게 정미의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도시락을 하나 더 싸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다행히 엄마는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그다음 날부터 졸업할 때까지 나는 엄마의 협조 아래 매일 도시락 2개를 가지고 학교에 다녔다.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 덕분에 나는 그다음 날부터 정미를 포함한 반 친구들과 함께 화기애애한 점심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비록 그 친구는 자기 얘기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소외되지 않고 미소 지으며 친구들과 함께 있는 모습에 나는 그저 뿌듯하고 좋았다.

초등학교 때 친구 도시락을 싸준 경험 때문인지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고아원 아이들을 만나고 청소년 대상 봉사를 위한 재단에 기부를 하고, 독거노인들에게 도시락을 싸서 배달하는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대기업을 그만두고 해외에 나갔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온 후에는 컨설팅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비록 결과는 미미했지만 사업을 하며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내가 꿈꿔온 사업가의 삶과 실제 창업가의 삶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결국 가정일과 병행하기 어려워 사업에서 물러났다. 그 후로는 프리랜서로 기업의 자문을 간간히 해왔다. 한국에 들어온 다음에 다시 시작한 봉사활동도 기존과 달라졌다. 그린피스와 국경 없는 의사회, 유니세프, 동물환경개선을 위한 세계자연기금(WWF)에 조금씩 후원하고 있다. 그리고 캣맘으로서 둘째 아이와 함께 동네 공원의 길냥이들에게 사료를 급식해 주고, 길고양이를 임시보호하는 봉사를 했었다.

나는 비록 자선사업가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내가 했던 활동을 돌이켜보면, 인간 사회뿐 아니라 동물과 자연에까지 관심을 넓혀 지속적으로 봉사와 기부를 해왔다. 몇 년 전 일이 생각난다. 일요일에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중에 급박하고 구슬픈 새 울음소리를 들었다. 무언가 이상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무에서 갓난 아기새가 추락하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털도 거의 없고 새빨간 살이 비치는 아주 어린 새였다. 그날 나는 전문가를 포함하여 도움이 될 만한 여러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방법을 모색했다. 근처 약국에서 물건을 사 작은 박스에 일단 아기새를 조심스럽게 옮겨 담았다. 그리고 경비아저씨에게 사다리를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을 드려, 결국 아기새를 나무 위 둥지에 안전하게 올려놓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한 여름에 2시간 30분가량 밖에 서 있느라 힘들었지만, 어린 생명을 살렸다는 데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나를 둘러싼 지역사회, 학교, 회사 등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으로서 세계 이슈와 국제기구 산하 단체들이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기부하고 있다. '기부와 봉사'라는 발자국은 내 삶 속에 선명하게 찍혀 퍽 가치 있는 일이 되었다.

이제, 남은 인생동안 이루고 싶은 꿈은 고아원 아이들을 멘토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이미 무너졌고, 아이들 대부분은 학습을 위해 사교육에 의존한다.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공부뿐만이 아니라, 선생님조차도 학원 선생님을 더 따르고 존경하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들은 공교육에서 무관심이라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사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거의 없다. 그 아이들의 인생 방향에 대해 제대로 조언해 줄 멘토 또한 없다. 다행히 내가 쌓아온 다양한 이력과 컨설팅 경험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 아이들이 긍정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한 길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멘토가 되고 싶다. 어려운 아이들 앞에 놓인 어둡고 아픈 가시밭길을 희미하게라도 밝혀주는 등대가 되고 싶고, 가시덤불을 걷어내 줄 촘촘한 그물망이 되고 싶다. 

내 인생의 후반기에 이루고 싶은 꿈은, 내가 알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제대로 성장시켜 보석처럼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육격차로 인한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없애는 것이다. 나와 내 아이만 똑똑해지고, 나와 내 아이만 배부른, 이기적인 세상은 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행복하게 성장하는 삶을 누렸으면 한다. 이런 생각을 실천할 수 있는 교육컨설팅과 자선 멘토링활동이야말로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 주고 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어린 시절 꿈꾸어 온 성공한 사업가와 자선사업가라는 꿈은 비록 규모가 아주 작아졌지만, 아직도 유효한 현재진행형이며, 미래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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