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 처음 등장하던 15년 전 즈음, 나는 사내 잡지부서에 속해있었다. 그 당시 회사에서는 변화에 대비해 사내에 신규 TFT 팀을 만들었다. ‘잡지와 책은 사라진다’는 업계의 불안감이 가득했던 시기였다. 나는 자원해 그 팀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전자책을 만들어보고, 사내 잡지를 애플리케이션으로 디자인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종이의 질감과 냄새를 쫓는다.
『언제 가도 좋을 여행, 유럽』은 2016년도에 다녀왔던 7박 9일간의 여행기를 기록했던 블로그 글을 기반 삼아, 2년 간의 초고와 퇴고를 거쳐 2019년 2월에 출간했던 공식적인(?) 첫 책이다. 프리랜서를 시작하며 진행한 첫 번째 개인 프로젝트가 바로 ‘책’이었다. ‘할 수 있는,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고 회사생활을 정리했던 2016년도만 해도 내 포트폴리오엔 단행본 디자인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시작이 되어준 것일까, 지금까지 줄곧 일해오며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디자인 분야는 유독 ’책‘의 형태가 많다.
요 며칠은 어딘가에 지원하기 위한 서류 준비로 마음이 분주하다. 경력은 물론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작업 중 단 열 개만 추려야 하는 포트폴리오 선정 앞에서도 한참을 고민하게 된다. 처음엔 대표할 만한 작업 10개가 되려나 싶었지만, 막상 또 추리고 추리다 보니 이것도 보여주고 싶고, 저것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 겨우 10개를 추리고 나니, 이제는 또 순서가 고민이다. 첫 페이지가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 도무지 어떤 걸 대표해야 할지 막막하다.
책이 처음 나왔던 2019년 이후로, 내 책을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걸 서류 준비를 하며 알았다. 겸사겸사 포트폴리오로 촬영해 볼 겸 책을 들춰본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신경을 안 쓴 곳이 없다. 가벼운 에세이지만 디자인적으로 눈이 즐거웠으면 해서 직접 지도도 디자인해서 넣었다.
스톡이미지 한 컷 값이면 얼마든지 벡터 소스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구글맵으로 런던 지역을 눈이 빠지도록 살펴가며 도로 하나하나를 정비하며 지도를 그렸다. 나름의 기준으로 색상과 굵기를 정해가며 정말 한 땀 한 땀 작업했던 기억이 난다. 가본 곳보다 가지 못한 곳이 훨씬 많은 런던 곳곳의 장소들을 살피며 지도 위의 아이콘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그때는 지금보다 수입도 훨씬 적고, 당연히 일도 별로 없었는데도 말이다.
살면서 꿈에 대한 물음표가 생길 때면, 자연스레 고흐를 떠올리게 된다. 꿈 앞에 사그라지려고 하는 나의 열정이 다시 솟아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 그래, 이 마음. 나는 이 마음으로 책을 만들었다. 수익이 없던 시절에도 마냥 즐거움으로 버틸 수 있었던 건, 내 안에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는 포부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마음. 회사 밖에서도 스스로 모든 걸 겪고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 이 책을 만들며 보낸 2년 가까운 그 시간이 혼자서 이렇게 오래도록 일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보이는 ‘결과물’로 모든 것이 평가되고 마는 디자인 업계에서 살아남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디자이너로서 내 위치는 어디쯤인지를 생각하면 아득해지기만 한다. 이렇게나 오래 일해도 나를 디자이너로 알아주는 건 오롯이 나의 클라이언트뿐이니까. 하지만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열정’만큼은 그 어떤 기준으로도 평가할 수 없다고 믿는다. 모든 디자인 결과물은 물성만 다를 뿐, 결국 디자인의 본질은 언제나 어디서나 같다. 디자인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정체성과 경험을 구축하는 일이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디자인으로 풀어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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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만들고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10개월 내내 나를 흔들리게 만든 건 의외로 다름 아닌 학업이었다. 원서 접수와 포트폴리오 제출까지. 20년 만에 다시 ‘원서 접수’라는 걸 했다. 대학원. 이제 와서 대체 왜? 싶지만 시도해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49대 51에서의 1은 언제나 해보는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