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브런치. 오랜만에 마음 먹고 다시 기록해보기로 합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나면,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창문을 열고 커피부터 내려 마신다. 공복에 커피가 안좋다는 말은 수백번 들어왔지만.. 이미 정착해버린 나의 생활 루틴이라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간밤에 어질러놓은 거실 물건들을 간단히 치우고, 몇 안되는 반려식물을 하나하나 살피며 실컷 분무를 해주고나면, 한참 마시고 있는 커피와 함께 식탁에 앉아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해본다. 요즘처럼 해가 일찍 뜨는 여름엔 이 패턴이 일찍 시작되는 편이다.
그래도 창작(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생각보다 나는 생활반경이 그리 넓지 않다. 아니, 좁다. 홀로 독립해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며 공유 오피스를 전전하다가 사무실을 집 안으로 들인 이후로는 더더욱이 그렇다. 게다가 코로나 까지 덮쳤으니.
얼마 전 서울에서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했다. 어느덧 서울은 반드시 해야 할 일(미팅)이 있어야만 나가게 되는 곳이 되었다. 코로나 이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코로나 이후엔 확연히 그 숫자가 더 줄어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나갈까 말까.
아무튼 이날은 새로운 클라이언트와의 첫 미팅 자리였다. 나는 미팅에 나온 4명의 담당자에게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적힌 명함을 건네며 나를 소개했다. 요즘 프리랜서로서의 거의 대부분의 수입은 '북디자인'이라 조금 민망했지만, 명함을 다시 만들기도 애매하고. 어쨌든 북디자인 역시 그래픽 디자인에 속하니까.
미팅을 마치고 난 후, 한 시간이 넘게 걸려 서울까지 나온 것이 아쉬워 나는 마침 근처에 있는 대형 서점에 들러 이런저런 자료조사 겸 책을 보러 가기로 했다. 기왕 간 김에 위태롭게 살아남아있는 내가 쓴 책도 찾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봐주었다. 뒤이어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간의 홍수 속에 내가 작업한 (클라이언트의) 책들, 그리고 아이디어 삼을 만 한 책들까지 여럿 살폈다.
일전에 스치며 봤던 책들, 찾아보고 싶었던 책들, 디자인이 예쁜 책들 위주로 서점 안을 돌아다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행 에세이 코너에서 멈췄다. 가장 편히 머무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행위이기도 한. 그리고 서가 구석 한 쪽에 내 책이 있기도 한 바로 그 코너.
여러 책들을 살펴보다 짙은 파랑 계열의 별색 하나만으로 표지부터 본문까지를 디자인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컬러 사용하는 것에 예민해져있는 나에게 단연 흥미로울 수 밖에 없는데다가 띠지에 크게 그려진 그림의 표정과 제목이 너무 찰떡같고 귀여웠다.
디자인 참 잘했다. 컬러 하나로 어떻게 이렇게 베리에이션을 줄 수 있지?
그림도 너무 귀여워 죽겠네.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들인가 봐.
이 작가도 코로나 때문에 유럽 여행 계획을 취소했구나, 나랑 똑같네.
2020년의 유럽 여행을 계획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망한 여행이 되었다며, 그러다 이렇게 지난 여행을 되돌아보며 이 글을 쓰게 되었다는 프롤로그의 글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의 여행기가 궁금해졌다. 사실 사진 한 장 실리지 않은 여행기도 처음이다.
코로나가 이렇게 길어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작년 초, 어느 클라이언트와 안부를 전하다 '이제 코로나 이전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며 농담 섞인 비관적인 말을 주고 받은 적이 있다. 제발 현실이 아니길 바라고 있긴 하지만, 줄어들지 않는 감염자 수와 점점 진화해가는 바이러스를 보고 있노라면 그 말이 어쩌면 진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독감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게 앞으로의 운명이라면.. 언제쯤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보다 앞으로 해외 여행은 할 수 있을까? 가까운 일본도 못 가게 생겼는데, 유럽은 꿈도 못꾸겠지?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면 조금 낫기는 할까? 아무 소용 없겠지? 생활반경이 좁디 좁은 사람에게 해외여행이란 건 정말 큰 추억이자 도전이기도 한 경험이나 다름없는 일인데, 당분간 이런 경험을 쌓을 수 없을 지경이라니. 어쩌면 좋아.
이 책을 계산하고 나오며, 앞으로 영원히는 아니겠지만(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정말 당분간 해외여행은 마음 속에만 품어두고 있어야 하는거라면, 비록 몇 번이 전부이긴 할지라도 처음 책에 담지 못한 지난 나머지의 여행의 기억들을 잘 보듬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연인지 모르게 그 생각이 처음 들었던 날,
오래 방치해두고 말았던 브런치 앱으로부터 오랜만에 알람이 울렸다.
240일이라니...!
그래도 1년이 되기 전에 알려줘서 다행이다.
분명 글 쓰는 행위로 나는 조금씩 성장할테니까.
그리고 브런치가 이렇게 응원해주니까.
천천히, 나답게. 기록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