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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다래 Nov 10. 2021

아침부터 행복해

유부가 있어서 그런 거 같아.

 오늘처럼 아침 일찍 눈이 떠지는 날이 있다. 컴컴한 방에 누워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가 화장실을 가겠다고 나서면 번쩍 일어나 따라나서는 유부. 최근 부쩍 큰 유부는 침대에서 같이 자면 1인분 이상을 차지하는 녀석이라 거실에서 재웠는데, 얼마 전부터 방 안으로 쿠션을 옮겨와 같은 공간에서 자는 중이다. 화장실에 다녀와 계속 잘지 말지 결정을 못했는데 유부가 꼬리를 흔들며 붕붕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니,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포근한 이불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유부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이구, 이 녀석아- 머리를 쓰다듬고 입을 맞춘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는 날.


 오늘 읽어야 할 책을 읽겠다는 마음으로 일어났건만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급하지 않은 일들을 하고 있으려니 유부가 장난감 하나를 물고 와 무릎을 톡톡 친다. 착한 녀석. 장난감을 몇 번 던져주고 다시 컴퓨터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유부는 터벅터벅 거실로 걸어가 배회하기 시작한다. 탁탁탁탁- 유부가 걷는 소리. 오른쪽 끝으로 가면 창문이 있지, 밖을 바라보고 싶겠지만 지금은 어둡다. 다시 탁탁탁탁- 장난감 상자를 뒤지는 소리,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하면 좋을 텐데. 다시 내게 오지 않고 조용한 걸 보니 소파 위로 올라가 노는 모양이다.


 방 안에 앉아 자판을 치며 뭔가를 해보겠다 마음먹었지만, 내 신경은 온통 밖에 있는 유부를 향해 있는 듯. 조용한 상태가 계속되어 뭘 하나 싶어 슬쩍 밖을 내다보면 유부는 내가 들썩이는 소리를 듣고 나를 향해 쫑긋 귀를 세우고 나를 바라본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훌쩍 소파에서 내려와 내게 오는 아이. 아이구 이뻐- 하며 유부를 안아 책상 위를 구경시켜준다. 연신 책상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녀석. 대단한 게 있을 줄 아는 모양이지만 별게 없다. 묵직한 유부를 한참 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나도 유부 냄새를 맡는다. 커다란 몸집과 콤콤한 흙내와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꽉 껴안고 놓아주고 싶지 않지만 유부가 싫어하니까 좀 참아봐야지, 마음먹는다. 좀 참아봐야지.


 나를 한참 기다려준 유부는 내가 얼굴을 들자 나를 한번 쳐다보고 아래로 내려간다. 아침부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니.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박박 감는다. 한여름 차가운 물을 끼얹는 것만큼이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뜨거운 물을 맞는 기분도 시원하다. 밖으로 나와 엄마표 믹스커피를 한 잔. 엄마표 커피는 믹스커피에 생강청을 한 숟갈 넣은 버전이다. 이런 혼종을 먹다니! 하고 처음엔 경악했지만, 맛보다 이렇게 마시면 엄마가 생각나고 처음 이 커피를 마셨던 날들이 생각이 나서 가끔 마신다. 오늘 아침엔 더 정겹게 느껴진다.


 평소라면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 거리다 호군이 나가는 시간에 맞춰 부리나케 준비해 뛰쳐나가기 바빴는데 오늘은 할 거 다 하고 커피까지 마셨는데도 여유롭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기분. 호군과 함께 밖에 나가니 첫눈이 내린다. 으아- 오늘 최고. 오늘 기분 최고. 오늘 진짜 행복해. 아침부터 이렇게 행복하다니-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치솟는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길 잘했다. 

 유부 말 듣길 잘했다.



공 소중해요. 놓고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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