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은둔자
혼자 있고 싶다. 늘 생각하는 나의 소원 소원 소원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아무 연락도 닿지 않는 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멍 때리다 오고 싶다. 갑자기 아는 누군가를 우연히 마주칠 만한 장소는 안 된다. 혼자 있는 게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신경 쓰일 만한 곳도 안 된다. 모두가 누군가와 같이 있는 곳에서 나만 혼자 있는 것은 괜시리 눈에 띌 수 있어 안 되며, 갑작스럽게 호의롭게 다가오는 친밀한 관계가 생길 만한 곳도 안 된다. 이왕이면 강제적으로 통신도 터지지 않는 곳이면 좋겠다. 휴대폰도 노트북도 불가한 곳에서 읽고 싶은 책들만 잔뜩 쌓아두고 누웠다 일어났다 읽었다 누웠다 오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파워 내향인이었다. 매월 봄이 정말 싫었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과 겨울. 어느 정도의 익숙함이 생겨나는 계절. 새 학기가 되면 그나마 편해졌던 교실, 같은 반 아이들, 선생님과 또 헤어지고 새롭게 적응해내야만 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게 싫은데, 뭘 자꾸 또 시작하래. 계획 세우는 것도 싫은데, 새 학년이라고 또 뭘 계획이랍시고 세워야 한다. 누군가와도 강제적으로 새롭게 친해져야만 했다.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을 순 없으니까. 혼자 있으면 이상해 보일 테니까. 툭 튀어나오지 않고 모나지 않은 척 적당히 눈에 띄듯 안 띄듯, 보일 듯 말 듯 스며들어야 한다. 물론 내가 적극적으로 먼저 잘 다가가지도 않지만, 외향적인 낯선 이에게 간택 당하여 어느 무리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안도감을 주었다.
초중고등학교까지는 억지로라도 한 교실 내에 스미려 해왔지만, 처음 간 대학교는 정말 날 사교의 장이었다. 게다가 내가 간 전공은 과 내에서 같은 과 사람들끼리 교류가 정말로 많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되는데, 나는 같은 색 옷을 입고자 무척 애썼다. 모두가 흰색을 입고 있는데, 나 혼자 검은색 옷을 입을 순 없지. 모르는 사람과 친목을 쌓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내가 세운 나름의 생존 전략은 잘 듣고, 잘 웃고, 리액션을 잘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기 말들을 하기 좋아하고, 안 웃겨도 웃어주면 좋아하고, 게다가 반응까지 하면 참 신나 했다. 그렇게 동기들과 선후배들과도 나름 섞여 보일 수 있었다. 매 학기 중에도, 방학 때도 얼마나 나름의 끊이지 않는 과 생활을 열심히 했던지, 고등학교 친구들은 내가 뭔 과대나 된 줄 알았다. 물론 늘 생각했다.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아웃 사이더가 되고싶어. 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남 일에 오지랖이 많을까. 지겹다 지겨워, 과 생활 때려치고 싶어. 이렇게 강제적으로 억지로 어울려야 하는 것 말고, 아주 가끔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즐거이 있다가.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있고 싶어.
그렇게 자란 지금은 어떤가.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보고, 여러 모임도 해보고, 직장생활도 해본 지금은 나름 어엿한 사회화된 내향인으로 보인다. 물론 지금도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지만 들킬 때가 많다. 아니, 이미 한 눈에 딱 봐도 그렇게 보이더라도 이젠 뭐 크게 상관없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둥글둥글한 흰 돌처럼 보일 수 있다. 아예 아무 말도 살 순 없으니까 소소한 대화 기술도 나름 익힌 것 같다. 더 이상 스마일 걸처럼 억지로 웃지도 않는다. 진심으로 듣는 것, 웃는 것, 반응하는 것만도 에너지가 쓰이는 일이기에 정말 웃길 때만 진심으로 웃으려 한다. 비슷한 지점이 있는 내향인들이 반갑고, 귀여운 외향인들이 좋고, 다른 사람을 웃게 할 수 있는 멋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탄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적당히, 적당히, 마치 하얀 백사장 속에 숨어 들어간 하이얀 돌. 군중 속의 일개 일인. 흠, 다행이야. 그래? 정말?
아니, 내 속은 사실 까맣다. 껍질만 하얗지, 얇고 바스러지기 쉬운 한 겹을 들추면 속은 새까만 암흑이다. 모나있고 뾰족하고 까끌거리며 방패로 무장되어있고 가시로 덮여있다. 봐, 그러니까 내가 어릴 적부터 제발 혼자 있고 싶다고 했잖아.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어느 정도 적당히 외향적일 것을 요구받는 세상에서 마음껏 내향인으로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 말을 안 하며 살 수 있으면 더더욱 말을 안 하고 싶다. 캐럴라인이 <명랑한 은둔자>에서 ’대화 기술 따위는 엿이나 먹으라지’라고 쓴 문장에서, 정말 얼마나 호쾌했는지 모른다. 수줍음의 옹호라니. 명랑한 은둔자라니 하는 글들은 제목부터도 어쩜 이렇게 호탕한가! 그래, 이제 어느 정도 자란 지금은 어쩔 수 없는 돈벌이 외엔 내가 내 시간과 내 에너지를 선택할 수 있다. 더 이상 강제적으로 어느 교실에 배정되어 새로운 옆 짝꿍과, 앞 뒤에 앉은 아이들과 스몰토크를 하며 스며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더더욱 때론 어느 모임에서 지금 방금 니가 아무렇지 않게 지껄인 이야기가 매우 무례하고 불쾌하다고 얼굴을 확 더 찡그려주고 싶다. 남을 깎아내리는 웃음과 손가락질에 에너지가 쓰이는 말로 받았으니 나도 되로 주고도 싶다. 때론 자리에서 확 일어나 집에 가버리고 싶다. 제발 진정한 관심과 걱정도 아니면서 가십거리에 그친 질문도 그만 받고 싶다. 세상 살면서 그렇게 살 순 없으니 혼자 있고 싶은 것도 있다.
캐럴라인 냅은 ‘혼자 있는 시간은 얼마쯤이면 충분할까’하고 질문을 던졌다. 지금으로선 그걸 생각만 하지 않고 실행에 옮겨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혼자 있는 게 너무 지겹디 지겨울 만큼 혼자 있어 보고 싶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정말 지겹기는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두가 각자 혼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곳,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지 않을 수 있는 곳, 홀로 있음이 존중되고,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매우 적극적으로 권장되는 곳에서 살고 싶다. 제발 각자 혼자 좀 있어 봐. 나 같은 사람은 익명성의 너울이 넘실거리는 타국에서 이방인이나 망명인처럼 떠돌아 살아봤어야 했을까.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업을 했어야 했을까. 혼자 있음의 뜨거운 고통을 맛봐야 할까. 고독함이면 몰라도 외로움은 거의 느껴본 적이 없는 나도 언젠가 어느 정도 함께와 홀로의 적절한 균형을 찾을 수 있게 될까.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마음결이 맞는 소중한 사람들은 그리울 때 애틋하게 가아끔 보고, 대부분의 시간은 진정 혼자 있고 싶다. 그러니까 아직도 늘, 부디, 제발 혼자 있고 싶다. 나 스스로에게도 누군가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혼자 있어도 괜찮아.
굳세어라, 강한 내향인!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를 읽고 썼습니다.
글 성지연
표지사진 재주소년 2003년 앨범 자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