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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May 22. 2023

불을 끄는 사람들을 만났다

주말의 기록


차 수리를 맡기느라 꽤 먼 동네까지 갔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라는데 마침 근처에 좋아하는 도넛 가게가 있어 굳이 아픈 다리를 끌고 십여 분을 걸었다. 어린이는 땡볕이 뜨겁다고 투덜거리다 그늘이 시원하다고 좋아하길 반복하며 따라왔다. 도넛 가게에 도착해보니 앉을 테이블이 없는 드라이브스루 전용이라 안타까워하며 제일 큰 아이스 아메리카노, 어린이의 주스, 그리고 도넛 한 개를 달랑 사서 나왔다. 카센터로 되돌아가는 길은 전략적으로 그늘을 골라가며 마시랴, 먹으랴, 발목 신경쓰랴 걷고 있는데 어린이가 갑자기 킁킁거렸다. “엄마, 캠프장에서 나는 냄새가 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옆 그늘을 드리운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연기가 모락 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옆에는 사일라(히잡과 비슷함)를 두른 여성이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아하, 뭔가 태우고 있나보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도넛을 한입 더 먹다가 아니 지금 대낮에 가로수 아래에서 뭘 태우는 건 불법 아냐? 싶어 눈치를 보며 다가갔다. 


여성은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가로수 밑둥 쪽 마른 낙엽과 나무 부스러기를 덮어 평평하게 만들어둔 영역이 까맣고 둥근 흔적을 만들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성냥처럼 저절로 꺼질 연기가 아니라 가만히 놔두면 바닥을 다 태우고 밑둥에 옮겨붙을 것 같아 보였다. 저거 지금 타고있는 거야? 라고 묻자 여성도 그런 것 같다고 그래서 남편이 지금 길건너 카페로 물을 얻으러 갔다는 거다. 아하.


아니 대체 어쩌다 이 길가에 나무 아래가 갑자기 타들어가기 시작한 거지, 하는 내 말에 여성도 누가 담배꽁초라도 버린 것 같은데 이렇게 방치되었다가 뉴스에 나오는 큰 불이 되는 거 아니겠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닌 게 아니라 다소 외진 지역의 큰 쇼핑몰들 사이 널찍한 주차장 틈새였으니 바로 옆을 지나가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았을 자리였다. 우리가 이런 대화를 잠깐 나누는 사이에도 몇 라인 건너 주차 자리에는 장 본 짐을 싣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별로 가로수와 희미한 연기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나는 남편이 물을 가지러 갔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내가 마시려던 아이스 커피라도 쏟아부으면 불씨를 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순간 방금 사서 몇 모금 못 마신 커피가 너무 아까워 바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비겁하게 말만 뱉었다. 이거 얼음이라도 부으면 도움이 될까? 그 말에 어린이도 옆에서 덩달아, 먹다 만 오렌지 주스는 어때? ... 몇발짝 다가서는 나를 여성이 만류하며 남편이 물을 얻어올테니 기다려보자 했다. 그 순간 바로 행동을 멈추는 나의 알량함이라니.


잠시 서로 말없이 타들어가는 검정 구멍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 길을 건너 남성이 큰 물통 두 개를 들고왔다. 그가 검정 원의 테두리부터 물을 붓기 시작하자 다행히 연기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불씨가 생각보다 깊었는지 큰 물통 두 개의 물을 바닥까지 들이붓고 나서야 연기도 완전히 사라졌다. (안 잡히면 정말 내 커피도 보태려고 안 마시고 있었다ㅜㅜ) 그제서야 우리는 다 같이 안도하는 심정으로 일찍 발견되어 다행이다 큰일날 뻔 했다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나는 그들에게 그냥 지나치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했고 그들도 이걸로 더 번지지 않고 꺼져서 다행이라 답했다. 


다시 카센터로 발걸음을 옮기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 벌컥 마시면서 어린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지나가다 저런 걸 보게 되면 어떻게 할거야? 얼만큼 불이 커져야 911을 부를 수 있을까? 아까 가져온 물 만으로 안 꺼졌으면 어떻게 했어야 되지? 그 분들이 무심히 가 버렸으면 내일 쯤 뉴스에서 화재 소식을 하나 더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린이가 타는 냄새를 엄마보다 빨리 감지한 것도 칭찬해 주었다. 에미는 그냥 먹고 마시는 것 밖에 신경 안 쓰고 있었어.


남의 눈을 거의 신경쓰지 않아도 될만큼 타인의 겉모습이나 서로 다른 특성에 대해 아주 무심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가 맞다. 그러면서도 뭔가 공공의 안전이나 타인의 어려움을 돕는 일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가 원래 살아온 곳과는 감도의 방향이 아주 다르다. 나도 빨리 더 익숙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불꽃 없이 까맣게 안으로 타들어가던 가로수 밑둥 부분이 눈에 선하다.


현장에서는 놀라서 화재 흔적을 촬영하지는 못함, 사진은 다른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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