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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Oct 26. 2024

엄마 이야기

2015년 2월의 글

저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였던 친정엄마는 6년 전 가을에 돌아가셨어요.


기관지 알러지처럼 끊이지 않던 엄마의 가벼운 기침이 폐암 말기 신호라는 걸 알았을 때 저는 아직도 유학을 끝내지 않은 채 미국에 있었고, 제가 혹시라도 학업 마무리를 못할까봐 한국의 모든 가족들은 엄마의 신신당부 아래 아무도 저에게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서 5월에 졸업과 더불어 국내 모 회사에 취업되면서 곧장 귀국했는데, 귀국 날 비행기에서 내려 친정아버지가 말씀해주셔서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실은, 그해 초 동생의 온라인 일기장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올라와 있어서 '이게 뭔소리야?' 라고 하면서 살짝 불안한 마음을 가지긴 했으나, 그 후에도 다들 함구하였고 저 또한 졸업과 취업을 동시에 맞으면서 계획보다 일찍 접게 된 미국생활에 대한 안타까움이 큰 나머지 그 불안함을 제대로 확인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답니다. 그렇지만, 한국 땅을 밟자마자 친정 아버지에게 듣게 된 그 소식에, 아, 그게 그거였구나, 하는 마음.


엄마는 약물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도 건강하셨고, 씩씩하셨어요. 늘 웃으며 우릴 안아주셨고, 가까운 지인들은 평소처럼 만나면서, 아버지와도 종종 지방여행도 다니면서 그렇게 지내셨어요. 그러다가, 강한 방사선 치료 끝에 폐렴이 오면서 (폐암 환자가 폐렴이 오면 끝이라고들 하죠)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고, 집중치료를 위해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귀국하고 딱 5개월만이었어요. 그 중 마지막 한달은 중환자실에 수면상태로 계셨으니, 마지막인 줄 몰랐던 4개월이 저는 엄마와 보낸 마지막 시간이었던 거예요.


처음에는 엄마가 아픈 그 상황을 수용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무조건 긍정적인 생각만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괜찮아지실거야. 당연하지.. 라고. 더불어서, 미국생활에 굉장한 미련을 가진 채로 귀국했는데 한국에서 제가 맞닥뜨린 상황은 차마 "아, 나 다시 나가고 싶어" 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마음의 부대낌도 아주 심했네요. 아무튼, 매일 새벽까지 야근이 이어지는데, 입원해있는 엄마가 폐렴이 와서 산소 포화도가 뚝뚝 떨어진다고, 호흡기 달았는데 잘 잡히지 않아서 중환자실 가야할지도 모른다고 친정아버지가 연락이 왔습니다. 프로젝트 막바지였기 때문에 속이 탔어요. 행사 임박한 일들을 내팽개치고 병원으로 달려갈 수가 없어서.


겨우 병원을 찾을 수 있던 그날 저녁 엄마는 중환자실로 이동하셨습니다. 입원실 방을 정리하는데, 남은 빵과 과일은 간호사 언니들 고맙다고 나눠주라고, 말하기도 힘든 상황에 호흡기 끼고 그 얘길 하던 엄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아버지도, 남동생도, 저도, 모두 엄마에게 입을 모아 걱정 말라며, 치료 잘 받고 빨리 털고 깨어나서 만나자고 인사를 하고, 엄마는 우리를 바라보며 웃어보이고,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침대에 실려 들어가셨지요. 중환자실 문이 채 닫히기 전, 제가 마지막으로 봤던 엄마 모습은, 호흡기를 바꾸기 위해 먼저 쓰고 계시던 것을 빼어냈을 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잔뜩 찡그린 그 표정이었습니다. 사실은 그 순간, 엄마도 정말로 두렵지 않았을까요...? 이제와서야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게 끝이었어요.


그걸 마지막으로, 우리 중 그 누구도, 다시는 엄마와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투여하기 시작한 수면치료제가 잘 맞지 않아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엄마의 폐는 상태를 견디지 못해 여러가지 나쁜 증상들이 앞다투어 올라왔고, 제대로 약물이 받는다 했을 때는 이미 폐도, 뇌도, 정상이 아니게 되어버렸어요. 깨워야 되는 시점이 왔는데 엄마는 깨어나지 못했고, 약간 반사반응을 보이던 것도 곧 없어져버렸거든요. 시간이 정해져있는 중환자실 면회 시간에 우리 세식구 돌아가면서 엄마를 만나고, 쉼없이 사랑한다 말하고, 고맙다 말하고, 기다린다 말했어요. 병동에 있는 조그마한 기도실 땅바닥에 엎드려 기적이 일어나기를 얼마나 울며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실낱같은 희망과 처절한 절망이 번갈아 덮치던 그 시간들.


그리고 결국 그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병원밥이 싫어서 모처럼 병원 근처로 나가 저녁밥을 먹고, 지하상가를 가로질러 병원으로 들어오다가 어느 옷 매장에 걸린 예쁜 가디건을 하나 사고 있었어요. 매장에 새걸로 나와있는게 없어서 창고에서 가져다 준다고 직원이 내려간 사이, 병원에서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네요. 상태가 위중하니 오셔서 준비하시는게 좋겠다고. 


매장 다른 직원에게 나중에 찾으러 오겠단 말을 내던지고 우리 셋은 정신없이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새벽 1시가 조금 넘어 중환자실 간호사 언니가 저희를 부르러 왔습니다. 세 분 다 들어오시라고.. 대낮같이 환한 중환자실 엄마 방으로 가니 기계에 의지해서 그래도 80 정도 가까스로 유지하던 산소 수치가 순식간에 뚝뚝 떨어졌어요. 70, 66, 54.. 엄마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했어요. 그리고 수치 0을 알리는 신호음과, 깊은 숨을 내쉬는 듯한 호흡을 마지막으로, 따뜻한 엄마 체온이 남아있는데도 거짓말처럼, 엄마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제가 굳이 온라인에 이 글을 갑자기 적어야겠다 생각하게 된 이유는요, 작년부터 개인적인 다른 일로 힘듦이 생겨 일년 가까이 심리상담을 받아오고 있는데, 제 마음에 가장 큰 짐은 '해결해야 할 감정을 그 때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안고 가는 것' 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깨닫게 되어서예요.


살면서 겪어온 여러 어려움들에 대해서 저는 대부분 '담담하고 의연한' 태도를 취해온 편이었어요. 평정심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보살피고, 상황을 풀어나가는 것에 집중하면서. 그러다 보니 제 자신의 마음아픔은 한번도 깊이 위로나 격려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묻어버린 경우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엄마를 떠나보냈을 때. 친정 아버지와 남동생에 대한 걱정, 엄마를 의지하고 지내던 가까운 분들의 상실감 걱정, 그래도 나 하나라도 꿋꿋해야 한다는 그런 마음으로 남들 앞에서 몇 번 울지도 않고, 그리워는 하되 제가 그리워하는게 티가 많이 나면 아버지나 다른 지인들이 가슴아파 할까봐 웃어왔어요. 엄마도 나의 '의연한' 모습을 자랑스러워 하겠지, 하는 마음과 함께.


그런데 사실은요,  엄마가 떠난 이후 저의 감정 기반이 얼마나 심하게 흔들리는지, 얼마나 외롭고 허전하고 쓰라린지. 묻고 싶은 것들은 살면서 더 많아지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점점 늘어나는데, 나를 다독여주고 격려해주고 같이 고민해줄 100% 나의 편인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제 자존감 자체를 완전히 땅바닥에 곤두박질 치게 만드는데. 그걸 인지하지 못한 채 제 자신이 굉장히 굳건한 줄 알고 살아왔어요. 상담 받으면서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 부분이었어요. 아, 나는 전혀, 괜찮은 게 아니었구나.


그래서 묵은지처럼 가라앉아 있는 감정 표출의 일환으로, 어떤 안전한 공간에서 엄마 얘기를 좀 해보고 싶었습니다. 벌써 만 5년이 넘은 일이라 괜찮을 것 같았는데 글 쓰다보니 어제처럼 생생하네요. 가장 많이 쓰는 SNS는 가족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어 차마 엄마 얘기를 쓸 수가 없고요, 친구들과 술자리를 해도 '이젠 괜찮아, 남은 사람들은 다 살게 되어 있더라구' 하는 말을 한지도 오래되어서 너무 새삼스럽고요, 사회생활 중에 새로이 알게 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남남이라 제 감정은 사실 관심 없잖아요. 다행히 저에겐 한줄기 빛과 같은 공간이 생겨서,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야기를 들려드릴 결심을 해봤어요.


저는 엄마가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려서 정말 슬프고, 속상하고, 절망했던 것 같아요. 이제 그 많은 이야기를 다 누구와 나누나, 결혼도, 육아도, 달라지는 내 삶의 수많은 스펙트럼도 엄마만 있으면 난 걱정할 것이 없었는데. 나는 아직 엄마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은데. 뿔뿔이 흩어져 살던 우리 가족 이제 엄마의 소원대로 다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는데, 힘든 일들도 다 지나가고 이제 엄마 아빠 소원대로 좋은 일들이 더 많아질텐데, 엄마한테 사랑을 받아만 먹던 우리들 모두 이제 어떻게 하나.


엄마를 아는 많은 분들이 저에게 말해요. 엄마가 얼마나 좋은 분이고 훌륭한 분이셨는지 (제가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긴 해요) 그런데 요즘 상담받으러 다니며 새삼 알게 되는 것은, 그러한 모습으로 늘 유연하고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엄마는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그럼에도 스스로를 가다듬고, 수없이 깎아가면서, 그런 득도(?)의 시간을 보내온 것일까, 하는 거예요. 엄마도 사람인데 얼마나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많았을까요.


그리고 그런 엄마에 대해 제가 품고 있던 로망은, 제 자신을 엄청나게 혹독하게 대하는 감정의 걸림돌이 되고 있더라구요. 그렇게 존경해온 엄마의 모습을, 반이라도 따라야지, 엄마는 남편에게, 자녀에게, 지인들에게 이렇게 했는데, 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엄청나게 높은 기준을 제 자신에게 들이대면서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제 자신에 대한 자존감의 끝없는 추락이라는 악순환. 이런 모습은 엄마가 저에게 원하는 게 아니었을텐데 말이예요.


성인이 된 후에 늘상 엄마에게 말했었어요. "엄마는 진짜 좋은 엄마 같애. 나도 나중에 엄마같은 엄마가 되야 할텐데." 그러면 항상 엄마가 대답하셨어요. "너랑 나랑 어떻게 같니. 너는 너 나름대로 또 좋은 엄마가 될거야, 넌 엄마보다 훨씬 잘할거야" 라고. 그런데 아이 낳고 지난 3년간 저의 모습은 '넌 왜 엄마처럼 하지 못하니' 하는 자학의 연속이었던 거죠.


일기장에 써야할 글이기도 하지만 저는 위로를 많이 받고 싶기도 해요. 이십대가 끝나자 마자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존재를 잃어야 했던, 철든 것 같았지만 여전히 어린애였던 제 자신이 이제와 돌아보니 많이 안쓰러워서요.


그리고, 집집마다 사정이 다르니 제가 천편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거지만, 아직 친정엄마와 싸우기도 하고 미워도 하고 수다도 떨고 하면서 무엇이 되었든 나눌 것이 있으신 모든 분들께, 정말 부럽다는 말씀도 꼭 하고 싶어요. 주변에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대화 중에 당연스럽게 나오는 "아 엄마가 뭐라 그래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야기 나올 때마다 '부럽다' 고 말할 수 없어서 듣고만 있는데, 사실 정말 부러워요. 엄마, 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으신 모든 분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마무리는... 그래서 저는 건강관리도 잘 하면서 살으려고 합니다!


엄마 참 건강하셨는데 건강검진 한 해 정도 거르신 게 전부였거든요. 딱 그 때였어요, 발병한 것도, 건강하셔서 병이 오히려 급속하게 악화된 것도. 초기에 잡았으면 지금쯤 아주 완전한 상태는 아니어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나의 우산같은 의지처가 되어주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미련... 저는 아직도 덜 자란 딸램인가 봅니다. 아아, 엄마가 끓여주시는 떡국 먹고싶네요.



오래 전 비공개 커뮤니티에 작성했던 글을 다듬어 옮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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