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우주, 나의 이야기 1
나는 기억한다. 인간이라서, 바꿀 수 없는 축복이자 가끔은 벌 같기도 한 두뇌의 저장 능력 덕분에, 길지 않은 살아온 인생의 장면들을 많이도 기억한다. 기억할 뿐 아니라 시시때때로 꺼내서 털어보고 돌려보고 뒤집어보고 접어보며 되씹고 곱씹는다. 어떤 기억들은 깜짝 놀랄 만큼 그 색상이 빠르게 옅어지는가 하면 또 어떤 장면들은 아주 오래 전의 사건인데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다.
일상을 바삐 보내는 동안 나의 기억들은 대개 얌전히 저장고에 머물러 있는 편이다. 하루를 가득 채우는 사소한 목표들에 쉴 틈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서인지, 갑자기 튀어나와 사람을 놀래키거나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잠깐 마음 속 어디 고개를 내밀었다가도 이내 다시 내면으로 숨어 들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꺼내보려 해도 나오지 않는 기억에 대해서는- 아마 사느라 애쓰는 나의 ’지혜‘가 되어주고 있으려니, 고마워한다.
그러다가도, 피할 수 없는 기억의 폭포를 갑자기 불러 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아마 사람마다 다를테지만, 내게는 그 마법의 주문이 바로 우연히 듣게 되는 노래, 내게로 흘러온 향기, 그리고 문득 얼굴에 닿는 바람의 온도다.
기억과 얽힌 감각은 순식간에 나를 그 때 그 순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나는 라디오에서 정해진 순서에 맞게 틀어준 가요 전주만 듣고도, 텅 빈 엘리베이터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잔향에도, 바뀌는 계절의 서늘한 바람을 마주치는 날에도, 어떤 기억들의 한복판으로 소환되어 버린다. 눈물을 붙잡고 정신없이 걷던 밤거리의 풍경, 한 무리의 친구들 틈에 그 사람을 처음 발견했던 긴 복도, 차가운 맞바람 너머로 펼쳐진 강가의 초록 불빛, 이런 것들이 갑자기 360도 아이맥스처럼 총천연색으로 나를 감싼다.
그리고 그럴 때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 때의 슬픔, 그 때의 기쁨, 그 때의 고통이 고스란히 떠올라 나를 채운다. 마치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혹은 상실에 허물어지고, 혹은 미친듯이 무언가를 원망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너는 왜 끝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하나님, 그렇게 간절히 엎드려 기도했는데 왜 우리 엄마를 살려주지 않으셨나요? 아니다, 실은 내가 그 때 거절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우리가 망가져 버렸어. 답이 있을 수 없는, 풀리지 않는 여전한 질문들, 어쩌면 지워지지 않는 반성이나 원망 같은 것들.
고민한다고 이제 와서 풀릴 문제도 아니고 바꿀 해결책도 없고, 아니 바꿀 필요도 없는 일들에 굳이 빠져들어 애틋해 하고 헤집어 아파하면서 왠지 그렇게 기억을 고이 고이 보존했음에 스스로가 기특하다. 잃어버리지 않길 잘했네. 그래도 버려버리지 않고 구석이지만 꾸깃꾸깃 넣어두길 잘했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조금 더 겸손해지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걸. 분노와 오만함이 나를 치켜세울 때 한번 더 생각하라고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건 언제나 옛 기억들이다.
이 글을 쓰며, 노래도 향기도 바람도 없지만 아기를 재우고 밤마다 글을 써내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설명할 수 없는 행복을 주는 아기와 매 순간 생채기가 생기는 일상 사이에서 어떻게든 나를 지탱하려고 애쓰던 시절이었다. 나와 비슷한, 어쩌면 그냥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 나와 비슷하다고 믿어버렸던, 언니들 동생들 친구들 틈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기억이나 끄집어 내어 주절 주절 낙서같은 글로 써대던 시간이 있었다. 그 덕분에 형체 없이 맴돌기만 하던 꽤 많은 기억들이 눈에 보이는 기록으로 남았지.
모든 기억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힘은 그 기억들 사이에 촘촘하게 녹아 있다. 틈나는 대로 내킬 때마다 기억을 기록으로 바꾸고 싶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은 장면 장면으로 이야기로 이어져 왔음을, 그 때의 감정과 시행착오들이 온 몸에 쌓여 지금 나의 어떤 선택들을 돕고 있음을 ‘기억’하고 싶다.
모임 과제로 제출한 글을 기록으로 담아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