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지만 둘 다 가진 거 맞아
어떤 일들을 정신없이 해치우는 동안 나는 대개 넓게 성장한다. 두려움 대신 일단 받아들 수 있는 배포, 보이지 않는 너머까지 감지할 수 있는 시야, 예민한 직관, 가장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도 놓치지 않는 힘, 순간적인 판단력과 균형 감각이 키워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많은 일들이 갑자기 멈춰버릴 때가 있다. 쉴새 없이 회전하던 나는 한동안 헛손질 헛발질을 한다. 왠지 해야될 것 같은 일들을 이리저리 헤집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아주 아주 먼 옛날 매일 마주하던 어두운 회색의 연습실 벽, 보면대 위의 가지런한 악보를 떠올린다.
"이제 조직의 울타리를 벗어났으니 자유롭게 확장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 알았어요."
몇 년 전에도, 지난 여름에도, 내가 더 이상 어딘가의 소속이 아니라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종종 내게 그렇게 말했다. 잠잠한 내가 뭘 하는지 궁금했다고 한다. 워낙 여기 저기 호기심도 많고 다양한 일을 좋아하지 않느냐면서.
변명하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랑하고 싶기도 했던 내 '다양한 호기심'은 사실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중 가장 긴 시간을, 나는 누구보다 오래, 누구보다 깊이, 하나의 일에 몰두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새롭게 나를 만난 분들이 지켜본 적 없는 나의 어떤 과거는, 아주 좁고 길고 멀고 끝이 없었다. 나는 그 과정을 몹시 괴로워했고 또 몹시도 사랑했다.
모든 '진행'이 멈춘 것 같은 시기가 그래서 나에게는 축복이다.
멈추지 않는 호기심 본능을 두고 '나는 원래 그래요!' 라고 설명하다 보면 자주 잊게 되는, 내 또다른 절반을 되살려 기억하게 한다. 하나만 죽자 살자 하는 거, 사실은 정말 재미있으니까. 한발짝 한발짝 진실에 다가설 때, 아주 천천히 조금씩 변화할 때, 오직 한 곳만 바라보며 전진할 때, 나는 놀랍도록 생생하게 살아있다.
앞뒤좌우 360도로 펼쳐지는 호기심이 좁은 바늘구멍 하나를 바닥까지 뚫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말을 사람들은 잘 믿지 못한다. 대부분은 살면서 어느 한 쪽에 더 가깝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뭐, 괜찮아. 굳이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그렇다고 나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도록 마음을 잘 붙든다.
한동안 엄청난 수평 확장으로 흐르고 있던 2024년이 마지막 분기를 지나며 뜻밖에도 수직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운이 좋아 한 번의 인생에서 수평과 수직을 다 겪고 있는 거다.
오랜만에 몇 가지 단서들을 붙잡고 물고 늘어질 기회가 주어졌다. 마치 벽장 속에 묵혀둔 논문과 악보들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는 기분이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전혀 다른 종류의 재미가 차츰차츰 되살아난다. 기초부터 쌓고 무한히 반복하며 차근차근 속도를 높여가던 오래되고 익숙한 나의 기술들을 다시 불러내는 중이다.
기대되고 걱정된다, 2025년. 이런 것을 일깨워 또 무엇을 나에게 안겨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