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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자 사용해도 될까요?

그냥 갑자기 일어난 어떤 일

by 마음씨

바로 며칠 전 여기 캐나다 동네에서 겪은 일.


아이를 학원에 들여보내고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내 의자 포함 총 세 개의 의자가 놓인 창가 쪽 테이블이었고, 테이블 위에는 아이가 먹다 남기고 간 것을 포함해 1/3 쯤 남은 두 개의 버블티 컵과 구겨진 냅킨, 빨대 껍질들이 놓여 있었다.


한동안 한두 사람 와서 주문하고 마시고 또는 테이크아웃 해서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한 무리의 가족들이 갓 식사를 마쳤는지 열띤 대화를 나누며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진 않았지만 창가에 앉았던 내 시야에 두세 명의 아이들과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어른의 수가 언뜻 비쳤다.


별 생각 없이 책을 계속 읽고 있는데 갑자기 내 옆의 빈 의자가 홱 움직였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일행 중 할아버지 한 분이 온 가족 앉을 자리를 구성하고 있었다. 작은 탁자들만 있는 카페라 그걸 세 개 모아서 붙이고 주변의 빈 의자도 가져가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나를 향해 놓인 의자를 가져가면서 묻지도 않다니. 음료도 두 개가 놓여 2인 일행일 수도 있을텐데. 나를 쓱 쳐다보고도 그냥 의자 모으기에 열중하는 할아버지를 잠시 쳐다봤지만, 굳이 못 가져가게 할 건 아니었기에 ‘내가 의자를 3개나 갖고 있어서 그랬나’ 하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십여분이 흐르고 나는 그새 그 일을 잊었다. 여러 사람의 주문이 밀려든 덕분에 와르르 와르르 얼음 갈아내는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백색 소음 삼아 글 속에 들어가 있다 보니 어느새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 조금만 더 읽고 갈까 미적거리는데 이번엔 갑자기 내 앞의 의자가 움직이는 거다.


또 놀라서 고개를 드니 아까 그 할아버지다.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번에는 나랑 마주 놓인 내 정면 앞의 의자를 그냥 가져가 버렸다. 일행이 다 앉고 보니 자리가 모자랐나보다. 아니 그런데 왜 내 테이블의 의자를 묻지도 않고 가져가지?


카페에서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닌 다른 테이블의 의자를 가져오기 위해 ‘실례지만 혹시 이 의자 쓰시나요’ 를 물어보는 법을 처음 배운 건 외국에서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고, 이제는 한국이든 어디든, 음식점이든 도서관이든 설령 아무도 짐을 올려놓지 않은 자리여도 - 바로 옆에 사람이 있다면 하다못해 ‘여기 누구 쓰는 사람 있는지‘ 묻는 게 상식이 된지 오래라고 생각했다.


탁자의 남은 잔여물들을 휴지통에 버리고 외투를 걸치는 그 1-2분 사이 엄청나게 고민했다. 일행이 있는지는 물어보셔야죠, 라고 한마디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왜 의자를 갑자기 당겨가는 순간에는 말을 못했나. 딸이나 며느리 혹은 아들이나 사위로 보이는 더 젋은 분들에게 한소리 할 것인가, 옆자리 의자가 필요하면 양해를 구하라고. 할아버지는 나를 한번 더 흘끗 돌아보았지만 이내 손주들의 잔 짐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인상 한번 구겨주지 못하고 카페를 나와 아이가 기다리는 학원 주차장으로 부지런히 걸어가면서 나는 내내 물음표가 남았다. 내가 어떻게 했었어야 할까? 이런 순간에 왜 나는 바로 대응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했을까? 일행 있다고 말해버릴 걸 그랬나?


그러다 결국에는 정말로 몹시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잘못은 내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끝)




덧.

글을 읽는 동안 어떤 모습의 할아버지를 상상하셨나요?

이 분은 캐주얼한 패딩 차림에 안경을 쓰신 금발 백인 할아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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