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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42살 겨울의 행복 - 삼미미

먹고 마시는 것의 기쁨


이제 예전만큼 목숨 걸고 음식 사진을 찍지는 않지만, 그래도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을 때 우리 얼굴 사진보다는 음식 사진을 찍는다. 한번씩 사진첩을 넘겨 보면서 음식 사진을 보면, 그 순간의 멤버들이나 음식의 맛, 나누었던 이야기까지 떠오르곤 한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술은 한모금도 먹지 않았던(못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사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나는, 24살에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갑자기 많은 음식과 술의 세계를 만났다. 20대의 술은 사실 전혀 즐겼던 기억은 없고, 그냥 회사생활에서의 생존을 위해 먹었던 것 같다. 반도체 공장의 문화에 적응하려고 맛도 없고 못먹는 술을 나름 열심히 따라 마셨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제일 건강했던 2,30대에는 술과 음식의 맛을 느낄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던 듯하다. 술은 남들이 마시니까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따라 먹는 거였고, 음식은 그냥 누군가와의 자리를 위해서, 그리고 배가 고프니까 별 생각없이 먹는 의미가 전부였던 기억이다.

본격적으로 내가 술을 곁들여 음식을 먹는 기쁨을 제대로 느끼게 된 것은 미국에서 돌아와 다시 취업한 30대 후반부터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내가 술맛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든 만큼 그동안 많이 먹어봐서 맛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는 그런 것보다도 막연한 내 삶과 미래에 대해 내 온 정신을 지배하던 엄청난 크기의 내 걱정들이 IT업계에서 두번째 커리어를 시작하면서 약간은 줄어들어, 내가 현재의 순간순간에 좀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술은 이제는 누가 술을 먹인다고 억지로 먹어야 하는 사회 초년생도 아니고,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술을 선택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주도권이 생긴 것도 크다. 어렸을 때는 술을 강권하는 자리에서 억지로 먹는 자리들이 너무 싫어서, 혼자 있을 때는 당연히 술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가끔 혼자 땡길 때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이따금의 저녁 시간들을 정말 사랑한다. 어느 정도 약간 비싸도 맛있는 음식들을 사먹을 수 있는 경제력도 생기면서(어렸을 적 먹고 싶은 반찬도 마음껏 사먹지 못했던 우리집 가정형편을 기억하면 정말 너무나도 복에 겹게 감사하다고 느껴진다), 그 맛있는 음식들을 더 맛있게 해주는 각종 술과의 페어링도 내 삶의 너무 큰 기쁨 중의 하나다.

지난 10월에 수술을 하고 퇴원하는 전날에도, 그렇게 간호사들과 영양사 선생님을 붙들고 내가 술을 언제부터 먹어도 되는지를 질문해 댔다. 오히려 당황스러울 만큼 '술을 먹으면 안된다'라는 말은 없었고, 그냥 적당히 자제하면서 먹으라는 답변만 받았다. 그 이후로는 그 전보다 술을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까지 하게 되니, 더욱더 한두잔(?)이 더 행복하고 즐거워졌다. '이렇게 맛있는 걸 못 먹을 뻔 했다니' 더 나아가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오래 먹을 수 있게 건강 관리를 더 잘하자'라고 마음먹게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맛있는 걸 좋아하는 것 치고는 그렇게 미식가가 아니어서, 적당히 맛있는 음식과 술이면 충분히 행복하고 그렇게 엄청 따지지도 않는 편이다. 오히려 접근성이 좋고 마음 편하게 한번씩 지를 수 있는 가격대를 선호하고, 너무 엄청난 수준의 것을 '죽기 전에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은 것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진의 장소는 최근에 우연히 팀 식사 후 발견하게 된 위스키바 '삼미미'인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회사 동료와 한번 더 다녀왔다. 적당한 수준(너무 위스키 전문가들이 가기에는 부족할 것 같다)의 맛있는 위스키들이 쫙 깔려있고, 시간당 계산해서 두 모금씩 무제한으로 내어 준다. 내가 가장 좋았던 포인트는 바의 '언니들'이 진짜 그런 '언니들?'의 느낌이 전혀 아니고, 정말 직장인 같은 아주 씩씩 싹싹하는 일잘러 여성분들이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술과 음식을 서빙한다. 위스키바이지만 조금씩 계속 쉬지않고 내놓는 안주 음식들도 아주 깔끔하고 정성들여 나온다. 시간을 정해 놓고 먹는다고 해도 시간이 다 되기 전에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정말 시간을 알아서 재면서 먹거나 아님 그냥 있었던 만큼 내겠다는 마음으로 맘 편히 있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이 날은 또 아이스크림에 일본 위스키를 조금씩 부으면서 먹어보라고 주셨는데, 진짜 인생에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한번씩 다음날 숙취로 고생하는 날도 있기는 하지만, 요즈음은 맛과 분위기에 더 집중하면서 즐기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만큼 절제력을 잃지 않고 적당히 먹는 것 같다. 평소에는 가능한 한 절식을 하고, 저녁에는 금식도 자주 하려고 하는데, 그만큼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을 때에는 또 신경쓰지 않고 즐기려고 한다. 뭔가 어쨌든 작년에 그런 수술을 하고 나니 이렇게 얻게 된 시간들이 더욱더 감사하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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