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바젤 여행기
55번 버스를 타고 국경을 건넜다. 창밖으로 이어지는 한적한 풍경을 멍하니 구경하던 중이었다. 신분증 확인 같은 절차도 없이 작은 세관사무소를 지나치니 독일이었다. 시 경계를 넘는 정도의 감각으로 우리를 독일에 날라 온 버스는 읍내 같은 분위기의 마을을 지나 비트라 정류장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왕복 2차선밖에 되지 않는 도로 건너편으로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Vitra Design Museum과 비트라하우스 VitraHaus가 보였다.
비트라 캠퍼스, 마침내 이 곳에 왔다.
비트라 캠퍼스에서의 첫 일정은 건축 투어. K가 언급했듯, 다른 신청자가 없어서 프라이빗 투어가 됐다. 우리를 담당한 가이드는 비트라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캠퍼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고, 우리가 건축가의 이름 같은 소소한 퀴즈의 답을 맞힐 때마다 무척 즐거워했다.
·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소방서 건물이 비트라 직원들의 지난 크리스마스 파티 장소로 쓰였다거나,
·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공장 옥상에 닿을듯한 구조물은 다리처럼 보이지만 사실 옆 공장 건물로 이어지는 길의 지붕 역할을 한다거나,
· 이 지붕은 비가 올 때만 지상에 가까이 내려와서 평소에는 자하 하디드의 소방서를 가리지 않게 했다던가(이미 캠퍼스 안에서 알바로 시자를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바 있는 가이드는 이 대목에서 'gentleman 시자가 lady 하디드를 위해 아이디어를 냈다'라고 표현했다.)
· 사나가 설계한 대규모 공장은 영리하게도 반토막씩 지어져서 건설 중에도 제품 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다던가,
·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콘퍼런스 파빌리온 안에는 노출 콘크리트의 구멍 하나를 깜빡 잊고 막지 않은 벽이 있다던가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양념처럼 더해져 즐거웠다.
건축 투어는 맑은 날씨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니 허기가 느껴졌다. 비트라 캠퍼스 안에는 레스토랑 겸 카페가 두 곳 있는데, 하나는 캠퍼스 북쪽 비트라하우스의 '비트라하우스 카페 VitraHaus Café', 또 하나는 캠퍼스 남쪽 비트라 샤우디포의 '디포 델리 Depot Deli'다. 두 번째 방문에는 디포 델리에서 간단하게 샐러드를 먹었지만, 이 날은 비트라하우스 카페에서 요리를 주문하고 맥주를 곁들여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머리 위에 펼쳐진 비트라의 최대 쇼룸을 샅샅이 보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할 테니까.
비트라 홈 컬렉션 Vitra Home Collection이 총망라된 비트라하우스는 테라스가 있는 꼭대기부터 한 층씩 걸어 내려오는 것이 권장 코스다. 우리는 버튼이 귀여운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비트라하우스는 넓고 비정형적인 실내를 크고 작은 열린 코너로 나누어 쓰고 있었다. 비트라의 다채로운 제품들이 디자이너별로, 제작 시기별로, 혹은 작업실이나 서재, 거실 등의 테마별로 각각의 무드에 따라 전시되어 있었다. 출장 모드로 공간의 구성이나 색감, 곳곳에 놓인 인쇄물들을 살피는 한편, 잠재적 고객으로서 눈여겨본 것은 각 코너마다 적절하게 놓여있는 소품들이었다. 비트라의 상품 분류에 따르면 의자도 테이블도 선반도 아닌 'Accessories', 즉 부대 상품이지만, 나에겐 이들이 메인이었다.
가구를 살 때는 신중해야 한다. 고가의 브랜드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더욱 그렇고,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주거환경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가구가 놓일 공간의 전체적인 컬러와 무드를 정하고,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파악한 뒤에야 흡족한 소비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구 하나만 예뻐서 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품(=오브제)은 다르다. 내 눈에 좋기만 하면 된다. 실질적인 기능이 없기 때문에, 임시방편도 필요 없고 대체품도 있을 수 없다. 소품을 고르는 것은 오로지 취향(과 돈)의 문제. 애매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액자나 시계를 거느니 벽을 비워두는 게 낫고, 어설픈 장식품보다는 책으로 선반을 채우는 게 낫다. 반면 백 퍼센트 마음에 드는 소품이 있다면? 공간 한구석에 놓는 것만으로 위안이 될 수 있다. 정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싶으면 잘 포장해서 보관해두면 된다(이 글을 곤도 마리에가 싫어합니다).
그래서 마음속 장바구니에 비트라의 의자는 없었지만 알렉산더 지라드의 'Wooden Dolls' 시리즈가 있었다.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바로 그 인형들이다.
이 시리즈는 알렉산더 지라드가 1952년에 자신의 집에 둘 장식품을 기획하면서 시작됐다. 각종 오브제의 수집광이기도 했던 디자이너가 결국에는 자신의 집에 두기 위한 소품을 직접 만든 것이다. 이 인형들은 현재 비트라 에디션으로 판매되고 있지만, 제작과 채색은 여전히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물고기나 고양이 등을 제외하고, 크기와 생김새가 제각각인 사람 형상의 조각품이 'Wooden Doll No.1'부터 'Wooden Doll No.22'까지 총 스물두 개. 여러 가지 조합으로 그룹을 이뤄 비트라하우스의 선반에, 책상에, 식탁에 놓여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비트라 캠퍼스까지 찾아온 여행에서 첫 우든 돌을 산다! 이보다 더 완벽한 기념품은 없다. 고민거리는 딱 하나, 누구를 데려가야 할까? 1번은 익살스럽지만 너무 튀고, 2번은 너무 핑크핑크하고, 8번은 누군가를 닮은 듯하고, 15번은 자세가 너무 경건하고, 20번을 고르기엔 나에게 고양이가 없고, 21번은 조금 화난 듯한 표정이 마음이 걸리고...
두 번째 날에야 비로소 결정했다. 건축투어에서 소개되지 않은 비트라 캠퍼스의 다른 건물들을 둘러보고, 스릴 만점 슬라이드도 타고, 비트라 샤우디포에서 빈티지 가구들을 실컷 보고 난 다음이었다.
밤톨 같은 두상에서 이어지는 긴 목과 큰 키, 아이를 둘이나 안고서도 미소 짓는 여유, 예사롭지 않은 패션감각. 5번, 너로 정했다.(하지만 역시 두 개는 사 왔어야 했어.. 새로 업데이트한 위시리스트에는 알렉산더 지라드의 Wooden Doll No.22, 그리고 비트라하우스에서 새롭게 발견한 조지 넬슨 George Nelson의 콘 클락 Cone Clock이 올랐다.)
비트라하우스에서 백 퍼센트 취향에 맞는 소품을 발견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K는 찰스&레이 임스 Charles Eames & Ray Eames의 집에 장식되어 있었다는 'Eames House Bird'를 데려왔다. 윤기가 나는 부드러운 형태의 까만 나무새가 K와 잘 어울렸다.
우리가 각각 임스 부부와 알렉산더 지라드를 고르다니. 직장 동료이자 친구 사이였던, 건축가 출신의 디자이너들이 각자의 집에 장식해두었던 오브제를 K와 내 집에 하나씩 두게 되다니.
정말이지 이 여행을 기념하기엔 더없이 완벽한 쇼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