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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eun Apr 02. 2019

10 바젤에도 맛집이 있었을까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바젤 여행기

스위스에 다녀온 사람들의 경험담에는 공통점이 있다. 알프스의 풍경은 모두가 예찬하는 반면, 음식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 것이다. 다들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에 맛없는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치즈 퐁듀는 특히 피해야 할 메뉴로, 지금처럼 스위스를 대표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본인만 당하는 게 억울했던 사람들의 음모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의 기쁨은 8할이 맛있는 음식에서 온다고 믿는 나는 이런 '괴담'에 겁이 났다. 맛있는 식사를 하려면 미슐랭 스타를 받은 파인 다이닝이라도 찾아가야 할까? 한 끼에 수십만 원을 내고? 아무리 서울의 물가에 면역이 되었더라도 그건 과했다. 인터넷을 헤매 봤지만 괜찮다는 후기가 드물었다. 여행지에서는 특히 한 끼 한 끼가 소중한데. 이러다가는 애매한 곳에서 맛없는 음식에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지불하거나, 마트에서 파는 차가운 음식들로 끼니를 때워야 할 판이었다. 정말 컵라면이라도 싸가야 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이 됐다.(결국 K가 준비해온 컵라면은 강행군으로 지쳤던 밤, 야식으로 유용했다.)


바젤에서 맛집을 찾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적어도 눈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 검색창을 닫았다. 공간이 멋지거나 분위기가 좋아 보이면 일단 들어가는 거다. 요리가 맛이 없으면 술을 마시면 되지!




1. Cantina Don Camillo (WERKRAUM WARTECK PP)


Werkraum Warteck PP 의 외부 계단


'칸티나 돈 카밀로 Cantina Don Camillo'는 'Werkraum(=workroom) Warteck PP'라는 건물 2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이다. 1900년 경에 Warteck 맥주 양조장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이제 예술가들의 레지던스가 되었다. 건물의 새 주인은 문이 떨어져 나간 오래된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쓰면서 외부 계단을 새로 설치했는데, 옅은 그린색 계단이 만들어내는 굵직하고 구불구불한 덩어리가 붉은색 벽돌 건물을 휘감는 듯한 외관이 무척 인상적이다.


이 건물에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외에도 식당과 바가 총 세 곳 있는데, 공교롭게도 K는 건물 1층의 바 'SUD'를, 나는 건물 옥상의 루프탑 바 'Kulturbeiz 113'를 각각 찍어두었다. 하지만 루프탑에 가기엔 너무 추웠고 SUD에는 술 외에 음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따뜻하고 든든한 식사를 할 수 있는 2층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Cantina Don Camillo


칸티나 돈 카밀로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예약을 하지 않고 방문하는 손님은 우리뿐인 듯, 거의 모든 테이블에 'Reserviert (=reserved)'라고 새겨진 돌멩이가 얹어져 있었다. 홀 중앙의 테이블로 안내받은 뒤, 공간을 둘러봤다. 이름에서는 왠지 팬시한 레스토랑이 연상됐지만, 인테리어는 소박했다. 옅은 노란색 페인트로 마감된 벽면과 노출 천장, H빔 기둥이 다소 거친 느낌을 주는 반면, 원목가구와 테이블에 놓인 노란 튤립, 불을 밝혀둔 촛불들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인상적인 건축물에 비해 인테리어는 전반적으로 평범하군, 생각하던 중에 건네받은 메뉴판은 완전히 실망스러웠다. 평범한 클리어 파일에 출력한 종이가 꽂혀 있는데, 심지어 레스토랑 이름이 잘려나간 페이지도 있었다. 바로 옆에 그래픽 스튜디오가 있는데, 이웃 찬스라도 쓰지.


샅샅이 뒤져봐도 예쁜 구석이 없는 이 메뉴판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모든 메뉴 카테고리에 쓰여 있는 “Plant-Based(채식 기반)”. 이럴 수가, 칸티나 돈 카밀로는 채식 레스토랑이었다. 자랑스러운 취향은 아니지만, 여전히 고기를 즐겨 먹는 내가, 멋진 건물에 홀려서, 비건 레스토랑에 앉아 있다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모험가의 자세로 고기 메뉴 대신 '파테 pâté'에 가깝다는 채식 메뉴를 골랐다(칸티나 돈 카밀로의 최대의 미덕은 닭, 소, 돼지, 양, 오리 등 각종 고기 메뉴도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기 없이 어떻게 파테를 만든담? 메뉴에는 독일어로 'Gemüse Nussbraten'라고 쓰여있었는데, 로스트비프에서 고기 대신 채소와 견과류를 사용하는 메뉴인 듯했다.


모험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소스가 조금 짜긴 했지만, 정말 고기를 쓰지 않은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풍부한 맛이었다. 돈 카밀로에서는 스테이크부터 아이스크림까지 'Plant-Based'로 즐길 수 있는데, 이만큼 다채로운 요리들이 있다면 채식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레스토랑의 주인인 듯한 아저씨는 우리가 서울에서 왔다고 하자, 도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며 신기해하다가 급기야 핸드폰으로 구글 번역기에 접속하더니 본인이 추천한 메뉴와 와인에 대한 소감을 한국어로 듣고 싶어 했다. '아주 맛있었다. 당신이 최고!'라고 쓴 다음 독일어로 번역해 보여줬다. 무척 기뻐하던 아저씨가 서비스로 아이스크림을 주겠단다. 이미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기대에 찬 호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동방예의지국의 여행자들에게 비건 & 홈메이드 아이스크림이 주어졌다. 바닐라와 생강 맛. 생강 아이스크림은 평생 먹어본 중 가장 강렬했다. 재료를 아낌없이 쓰는구나... 다시 간다면 초코 무스를 먹어야지...


예술 레지던스에 위치한 것 치고는 브랜딩이나 쿨한 그래픽 따위엔 관심이 전혀 없는, 오직 메뉴만이 새로운 식당이었지만, 유쾌하고 친절한 서비스 덕에 즐거운 저녁이었다. 하지만 아저씨, 옆집 디자이너들이랑 친하게 지내봐요.


Cantina Don Camillo의 Gemüse Nussbraten, 서비스로 나온 아이스크림, 그리고 명함




2. EATERY (HOTEL NOMAD)


HOTEL NOMAD 1층의 EATERY


호텔 노마드 Hotel Nomad는 마지막까지 숙소 후보였다가 끝내 탈락한 곳이다. 숙박 대신 식당에 가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호텔이 위치한 곳은 틀림없이 바젤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데, 이른 저녁시간임에도 새벽녘 강남역보다 사람이 적어 보였다. 하지만 "EATERY"라고 쓰인 출입문을 열자, 사람들의 대화와 온기로 가득한 공간이 나타났다. 다들 안에만 있었던 거야? 사회 초년생으로 보이는 발랄한 그룹부터 나이 지긋한 어른들의 모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현지인들이 퇴근 후의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긴 테이블의 바깥쪽 끝에 자리를 잡고, 서버의 추천을 받아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메뉴 두 개를 주문했다. 당연히 맥주와 함께.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실내를 간단히 둘러봤다. 노마드 호텔은 실내를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하고 일부는 목재를 썼다. 내추럴한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사인은 단순하게 검은색 글자만 얹어서 표현했다. 글자는 모두 로고타입과 뿌리가 같은 폰트를 썼는데, 'Festivo'로 추측된다(따옴표의 모양이 달라서 의문).


호텔의 분위기는 그대로 식당까지 연결된다. 메뉴에서도 다른 그래픽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벽면의 포인트 컬러와 폰트를 최대한 활용했다. 글자체를 쓰려면 일단 글자가 있어야 하니까, 오스카 와일드나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유명 작가들의 말을 빌려다 메뉴판의 빈 공간들을 채웠다. 독창적이진 않지만 영리한 아이디어였다. 조금 의아했던 것은 주류 메뉴판 앞면에 '처음에는 당신이 술을 마시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그다음엔 술이 당신을 마시게 된다. First you take a drink, then the drink takes a drink, then the drink takes you.'라고 쓰여있었던 것. 술을 더 시키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HOTEL NOMAD와 EATERY의 글자들


레스토랑의 구석구석을 눈에 담는 사이, 첫 번째 메뉴가 나왔다. '안티파스토 미스토 Antipasto Misto'. 이탈리아식 모둠 전채로, 우리에게는 모둠 안주 격이었다. 나무 보드 위에 몇 종류의 생 햄, 루꼴라와 함께 파르메산 치즈가 덩어리째로 얹어져 있다. 말린 토마토와 올리브도 푸짐하게 곁들여졌다. 가격이 비싼 대신 양으로 승부하는 게 바젤 식당들의 특징인가?


맥주를 들이켜는 사이에 나온 두 번째 메뉴는 '노마드 카레 소시지 Currywurst Nomad'. 호텔 이름이 붙은 메뉴여서 믿음이 갔는데, 바젤 산 송아지 고기로 만든 소시지에 카레 소스를 입힌 음식이었다. 송아지 고기로 스테이크가 아니라 소시지 따위를 만드는 호기로움. '소시지 따위'는 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우리는 푸짐하고 짭짤한 안주를 핑계 삼아 맥주와 와인과 칵테일을 연달아 주문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술을 마셨고, 그다음에도 우리가 술을 마셨고, 다행히 마지막까지 우리가 술을 마셨다.


EATERY의 Antipasto Misto, Currywurst Nomad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즐거웠지만, 바젤에서 눈이 호강한 만큼 입을 채워주기는 어려웠다. 나처럼 한 끼 한 끼를 소중히 여길 여행객들을 위해 작은 팁을 공유하자면, 맥주보다는 화이트 와인이 맛있고, 햄과 치즈 플레이트는 언제나 최선이다. 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면 일반 식당의 비건 메뉴는 섣불리 도전하지 않는 것이 좋다.(특히 피자 체인점의 비건 피자는 쳐다보지도 말자.) 그리고 숙소 근처의 베트남 음식점과 일본라멘집을 미리 찾아두자. 축축하고 차가운 날, 따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 유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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