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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cos Nov 11. 2015

이터널 선샤인

우리의 사랑은 뻔하게 시작되고, 당연하게 식어버려요.

 


우리의 사랑은 뻔하게 시작되고, 당연하게 식어버려요


영원히 내려쬐는 햇볕은 꽁꽁 얼어 붙은 내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지만, 이내 더위로 또 나를 지치게 만들어요. 포근함의 기억이 사라질 쯤 그 자리를 불쾌함으로 채워져요. 그러면 우리는 또 선택을 해야 하지요. 식어버린 마루에 두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볕이 살짝 데운 포근한 자리가 그립지만, 시간이 흐르면 포근함이 사라져버릴 것을 알기 때문에 괜히 두려워 앉기 망설여져요. 하지만 바보같이 양지 한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네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 만큼 멍청한 짓이네요.



이렇게 나쁜 기억력을 가지고 당신과 만나려고 하니, 괜스레 힘들어져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골목길에서의 떨림보다는 일주일 전의 다툼이 더 먼저 떠오르고, '처음'이라는 단어가 붙은 모든 우리의 추억보다는 어젯밤, 우리가 가졌던 지루한 시간들이 더 생생해요. 좋았던 기억은 너무 멀어졌고, 먼지만 쌓여있는데, 안 좋았던 기억은 왜 이렇게 우리와 가까이 있나요? 지치고, 너무 힘들어요. 만약 당신과의 추억을 없앨 수만 있다면, 내 소중한 것 하나쯤은 포기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당신의 모습이 희미해집니다. 

지난밤, 별거 아닌 것으로 다퉜던 기억이 사라집니다.  

지난주, 지루하게 서로의 얼굴이나 쳐다보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손에 쥔 핸드폰으로 시선이 갔던 기억도 사라집니다. 카톡으로 싸웠고, 전화로 싸웠고, 또 서로 화해하고, 며칠 안 지나 또 싸웠던 기억도 사라집니다. 


그렇게 기억은 가까운 것을 시작으로 점차 사라집니다.

 

여의도 한강공원 잔디밭에 돗자리 하나 피고 서로의 어깨를 배게 삼아 기대 앉은 채 주구장창 바라봤던 불꽃놀이의 추억도 사라집니다. 만난 지 일 년이 되던 날,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넥타이 선물도 잊혀집니다.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나에게 너무 소중한 것들입니다. 소중한 것 하나 포기하더라도 지우겠다고 말했지만, 소중한 것이 당신인 줄은 몰랐습니다.



혼자 떠난 골목길 여행에서 몇 번이고 부딪혀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연발했었던 그 날. 

당신을 보고 너무나도 두근두근 걸렸던 내 마음을 진정시킨 채 당신에게 건네었던 말 한 마디의 기억도 사라집니다.





  



당신의 이제 그저 그런 사람이 되고 말 거예요. 출근길 마주치는 수 많은 얼굴들처럼, 지나가는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사람들처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런 사람들처럼 나에게 그냥 한 명의 낯선 사람이 되어버리겠죠. 우리가 보낸 시간은 시간이 아닐 거예요. 그저  꿈같은 시간이었요. 나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당신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만약 정말 우연하게 또 어느 골목을 돌다 당신을 보게 된다면, 그때도 저는 당신에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걸 거예요. 그리고 제가 건넨 그 말이 "차나 한잔 하실래요?"와 같이 아무리 진부한 문장일지라도 당신이 대꾸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우리는 그럴 거예요. 


아무리 영원한 햇볕이 우리를 지치게 만들어도, 저는 언제나 그렇듯이 두 다리 꼰 채 양지 한 구석에 앉아 있을 거예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런 멍청한 짓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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