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뮤 Oct 15. 2021

꼭 여행 온 것 같아

갑자기 떠난 강릉 여행

"꼭 여행 온 것 같아."

이 말을 오늘에만 두 번 들었고, 그때마다 나는 "우리 진짜 여행 온 거야, 여보."라고 대답했다.


대꾸는 그렇게 했지만 나도 남편 말의 그 속뜻을 안다. 꼭 (한국이 아닌 어디 멀리) 여행 온 것 같다, 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나도 여기가 한국인 것, 그리고 남편과 여러 번 여행을 왔던 같은 장소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꼭 여행 온 것 같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행을 하고 있으면서 여행 온 것 같다, 라는 말을 하는 남편을 보며 오늘은 문득 글이 쓰고 싶었다.

 





나는 어제로 임신 29주 차 임산부가 되었다. 결혼 전 몸무게 앞자리는 4였고, 결혼 후에는 5, 임신한 후에는 6이 되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은데,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임신도 성공했는데 뭐... 몸무게 앞자리 바뀌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다.


코로나 1년째에는 정말 두문불출하며 칩거생활을 했고, 코로나 2년째에는 가벼운 외식은 즐기면서 집 밖 생활을 했지만 '여행다운 여행'은 없었다. 그러다 임신을 하고, 안정기가 찾아오자 다신 오지 않을 우리 부부 둘만의 시간을 어떻게 해서든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고 싶었다.


살아보니, 여행만큼 진하게 남는 기억도 없더라.




우리 부부는 서로 '선택'을 미루는 경향이 짙다. "우리 여행 갈까?" "그래, 가자." "어디로 갈까?" "부산? 제주도? 강원도?" 여기까지는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데 막상 진짜 '선택'을 해야 할 때는 대화가 빙글빙글 돌고 돌아 자꾸 원점이 된다.


딱 3일 전에 남편이 불쑥 "강릉 가버릴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가 사 온 8개의 4천 원짜리 망고를 먹다가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어디서 험한 인생을 살다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 온통 시퍼렇게 멍든 망고는 그래도 달았다. 물론 과육의 탱글함은 느낄 수 없었지만, 몇 해 전 다녀온 베트남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한 맛이었다.


망고 껍질까지 쪽쪽 핥으며 "진짜 그래 버릴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 아니라 다시 한번 결정을 남편에게 던진 것이다. 나는 머리로 빠르게 계산을 했다. 왕복 KTX 교통비, 숙소비, 식비 외 기타 경비 등등. 가뜩이나 출산을 앞두고 큰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텐데 충동적인 여행을 가는 게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남편이 툭 던진 한 마디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는데 그는 나의 반문에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이었다. 마치 먼저 사귀자고 해놓고 손도 잡을 생각 없어 보이는 격이랄까. 그러니 아무 생각 없던 내 쪽에서 반대로 안달복달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싱겁게 끝나버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금요일이 되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도 훌쩍 떠나고 싶은 자아와 충동적 지출만큼은 막고 싶은 내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결론이 나지 않자 나는 다시 남편에게 선택의 기회를 넘겼다. 카톡창을 열고, "여보 미친척하고 강릉 뜰까?"라고 썼다.


 몇 분 뒤 그에게 "그렇게 가고 싶어?"라는 카톡을 받았다.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하게 가자라는 말에 마침표나 느낌표를 찍지 않는... 질문을 했는데 질문만 돌아오는...


이상한 우리 부부의 대화법.


그러나 이 지난한 대화도 결국 끝은 있다. 내가 그의 질문에 여행이야 물론 가고 싶었지,라고 하자 카톡으로 이미지가 하나 전송되었다.



청량리-강릉 오전 6시 22분 출발



"실은 내일 아침 6시 열차 예매해두긴 했는데..."


남편의 수줍은 고백. 간만에 설레었다. '훗 좀 귀엽네.'


저 사진 하나로 '충동 여행 및 충동적 지출'에 대한 명분이 생겼다. 우리 둘 다 진짜 여행이 떠나고 싶은 거고, 뱃속의 아이까지 다시는 없을 이 소중한 시간을 추억하기 위해선 과감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 후는 일사천리였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움직이는 것보단 밤 기차를 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당일 예약 가능한 숙소를 꼼꼼하게 비교하며 예약을 마쳤고, 여행 가방을 후다닥 쌌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우리 부부는 강릉행 KTX에 몸을 실었다.

 





단 2시간이면 광활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경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 이번만큼 놀라운 적이 없었다. 시원하게 고막을 때리는 파도 소리, 온통 시선을 사로잡는 횟집 간판들, 그리고 아파트 숲 사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밤하늘의 별들... 


2박 3일 동안 우리는 걷고, 먹고, 찍고, 보고 단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배가 무겁고, 발은 퉁퉁 부어 간만에 꺼내 신은 단화가 족쇄처럼 꼭 끼었지만 힘든 것보다도 이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코로나 시대에 이런 사치를 누릴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격스러웠달까.


한껏 센치해진 우리 부부는 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꼭 여행 온 것 같다고.'

정말 우리가 훌쩍 여행을 떠난 게 맞긴 하지만, 그래도 꼭 여행 온 것 같다고.




꼭 여행 온 것 같았던, 강릉 여행.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남자의 청소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