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뮤 May 29. 2020

그 남자의 청소법

당신 남편의 청소는 안녕하십니까?







남편과의 결혼 생활 에피소드를 적다보니 의외로 집안일에 대한 주제가 자주 등장한다. 결혼은 결국 일상이고, 일상은 결국 집안일로 귀결되니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남편만의 독특한 청소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남편이 청소에는 영 재능이 없다는 것은 진즉에 알았다. 연애 시절 가끔씩 그의 자취방에 가면 바닥에 널부러진 마른 빨래감들을 개거나 냉장고에서 구조되길 바라고 바라다가 허옇게 곰팡이가 핀 음식들을 뒤처리 해주면서 내가 이 정도로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실감했다. 남편은 끊임없이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사다 받치고, 나는 끊임없이 남편의 자취방을 청소해주면서 우리는 사랑을 속삭였다. 우리는 악어와 악어새의 인간 버전이었던 것이다.


연애시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의 청소 이력이 결혼 후에는 꽤 골치아픈 문제거리가 되었다. 결혼 전에는 아무리 더러워도, 아무리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여도 "남의 집"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면 나에게 해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젠 그가 "내 집"의 질서를 어질럽히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일 안하는 내가 청소를 하는 게 당연하지 했다가 내가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재능에도 없는 요리를 결혼 후에 노력해야 했던 것처럼 남편도 청소 재능이 없어도 조금씩 그의 몫을 해야 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가 손가락 하나 까닥 안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도 나름 뭔가를 하긴 했다. 자의로 한 적이 없어서 그렇지...


결혼 생활 3년차가 되니 조금씩 더 집안일에 본인의 지분을 늘려가는 남편을 보며 뿌듯했다. 사람은 징하게 안 변하지만, 또 사람은 시간과 환경에 의해 변하는 존재다. 지난 3년 동안 진화해 온 이 남자만의 어딘지 허술하지만 귀여운 청소법을 낱낱히 살펴보자!


남편은 마치 위대한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나서 서명을 그려넣는 것처럼 청소 후 자신이 했다는 흔적을 꼭 남긴다. 때론 대놓고 남길 때도 있고, 때때로 한참이 지나서야 그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의 청소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30분이 넘도록 열심히 한다. 설거지를 끝내면 칭찬을 받고 싶어 내게 곧장 쪼르르 달려온다. 내가 "아유 수고했어. 여보~"하고 한껏 콧소리를 섞어 '궁디팡팡'을 해주고 나서 보면 설거지통 옆에 영문을 모른채 혼자만 소외당한 컵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거나, 기름때가 두껍게 낀 후라이팬이 인덕션 위에서 말끔해진 상태로 놓여있는 냄비 친구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기 일쑤였다. 내가 황망하여 "여보... 얘는 왜 아직?"이라고 물으면 정말 화들짝 놀라며 "헐, 못 봤어! 진짜야 여보!!"라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내가 남편을 보아온 세월이 길어서 잘 아는데 그의 이 놀란 표정은 '찐'이다. 그래서 허탈하게 웃을 뿐 그를 나무랄 수 없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는 약속 장소에서 코 앞에 서 있는 나를 못 보고 "자기 대체 어디야?"라고 전화했던 전적이 있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고 나도 그의 앞에서 못 본 척 연기를 했는데 민망하게도 그는 정말 나를 못 알아 본 것이었다. 주변 사람 얼굴에 초점을 잘 안 맞춘다는 게 그의 변명이었다. 남편은 설거지가 대충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주변에 컵이나 후라이팬에 초점이 안 맞는 것이 분명하다는 합리적 의심을 한다.


그는 청소 중에서 빨래를 가장 좋아한다. 물론 그가 기계공학과를 전공했기 때문이다. 세제를 넣고 버튼을 몇 번 조작하면 기계가 스스로 돌면서 빨래를 해주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적당히 모이면 빨래를 하려고 마음 먹어도 어느새 세탁기에는 세탁을 마친 빨래들이 나를 기다린다. 아, 물론 그는 빨래는 돌리지만 꺼내지 않는다. 기계조작이 끝나면 본인의 할일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내가 일찍 발견하지 않으면 쉰내 나는 옷들을 다시 빨아야 하거나, 조기에 발견하면 얼른 건조기에 넣고 나머지 수순을 밟는다. 그러나 기특하게도 그가 건조 과정까지 스스로 할때가 있다. 바로 당장 내일 입을 셔츠가 없을 때다. 다른 셔츠를 입고 가라고 해도 본인이 좋아하는 셔츠가 아니면 입지 않는다. 다음날, 셔츠만 쏙 빼내어 입고 출근 한 남편을 그리워하며(애증하며) 남은 빨래를 꺼내 차곡차곡 갠다. 내가 기억하는 한 결혼 3년 동안 남편이 세탁에서부터 건조까지 곧바로 하고 직접 빨래를 개켜 정리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지독한 일관성이다.


빨래 이야기는 그게 끝이 아니다. 이 남자의 진짜 시그니처 청소법은 건조기의 먼지망을 절대 털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편이 워낙 빨래를 자주 하다보니 "여보, 건조기 사용하면 꼭 먼지 제거해줘!"라고 귀에 피가 흐르도록 당부하지만 건조 된 빨래를 꺼내면 여지없이 먼지망이 꽉 차있다. 이 정도 양이면 처음부터 먼지망을 비우지 않았다는 소리가 된다. 그를 자극시켜 경각심을 심어 줄 요량으로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건조기 먼지 제거는 열이면 열 번을 잊어버려?"라고 물으면 "그러게?허허"하고 내 질문을 흡수해 버린다. 아무래도 '나처럼 똑똑한 사람이'에 방점을 찍고 허허 웃어버리는 것 같다. 내가 방점을 두려 던 부분은 거기가 아니야...


남편이 청소기를 돌리는 방식도 참 그답다. 그가 청소기를 사용하는 경우는 제거하려는 타겟이 명확할 때 뿐이다. 매일 먼지가 쌓여있는 방바닥은 그에게 기본 세팅 같은 것이어서 딱히 청소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과자 부스러기가 간과하기에는 너무 존재감이 커졌을 때나, 먼지 크기를 상회하는 어떤 건더기가 방바닥에 있을 때 친히 청소기를 든다. 남편은 효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뼈 속까지 이과생이기 때문에 자신이 제거하려는 목표만을 정확하게 빨아들인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진다. 잔소리를 좀 줄이고 싶은데 꼭 내가 "여보 하는 김에 구석구석 좀 부탁해"라고 말하게 만든다.


한번은 화장실 청소를 여태 나만하는 것 같은 억울함이 밀려와 남편에게 화장실 바닥 청소를 부탁했다. 남편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동안 나는 그 외의 나머지 집안일을 착착 해나갔다. 생각보다 빠르게 청소를 끝내고 소파에 늘어져 있기에 나는 청소기를 돌리다 말고 화장실에 가 보았다. 타일 사이사이를 솔로 문질러 닦은 흔적은 있었다. 수술 후 자신이 사용한 메스와 장갑을 정갈하게 벗어 놓은 의사처럼 남편은 본인이 청소에 사용한 도구들을 화장실 한 쪽편에 정갈하게 뉘여 놓았다. 몸만 빠져나간 이불처럼 사람은 빠져나갔어도 그의 마지막 행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 흔적들이 화장실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혀서 헛웃음만 나왔다. 변기에 붉그스름한 띠도 그대로, 세면대에 물때도 그대로인데 오직 한 쪽 켠에 놓인 청소도구들만이 '청소의 시도는 있었음'을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리 좀 와봐.


남편은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봐야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 수포자에게 복잡한 수식이 적힌 종이를 눈 앞에 갖다대고 아무리 흔들어봐야 눈에 봬는 게 없을 것이다. 남편은 두 눈을 꿈벅이며 '엉? 뭘 보라는 거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또 디스베틀에 나선 랩퍼처럼 그가 했어야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읊었다. 남편은 멋쩍게 웃으며 알겠다고는 하지만 소파로 도로가서 앉는다. 결국 내 눈에만 보이는 곳곳에 물때를 벅벅 문질러 닦으며 '그래, 한술 밥에 배부르랴'하며 분노를 삭혔다. 내가 심청이가 되어서라도 남편의 저 감긴 두 눈을 뜨게 하리라!


남편의 청소에는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난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허술한 매력이 있다. 그래도 이제는 집안일에 대한 그의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젠 내가 설거지를 하면 미안해 하고, 고마워한다. 내가 빨래를 꺼내와 개고 있으면 슬쩍 눈치를 보다가 양말 한 켤레라도 접어서 도와준다. 집안일에 대해서 부탁하면 허술할 지언정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 남편이 놓친 설거지거리, 건조기의 먼지망, 널브러져 있는 청소도구는 내가 조금씩 도와주면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렇게 멋진 합을 맞춘 것처럼 앞으로 몇 년간 더 합을 맞춰나가다보면 환상의 콤비가 되어있을거라 의심치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간 보지 않는 아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