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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Apr 11. 2020

간 보지 않는 아내

by. 오귀스트 르누아르_ 뱃놀이 후의 점심




"당신은 도대체 왜 을 안 보는 거야?"


어김없이 남편의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결연한 태도로 간 보기를 거절한다. 연애시절부터 요리에 관심이 없고, 요리에 재능도 없고, 먹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을 누누이 했지만 남편은 아내가 '간 보기' 자체를 싫어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간 보지 않는 아내다.


나와 반대로 남편은 요리 DNA가 몸에 흐르는 것 같다. 평생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만 먹고, 자취 시절에도 배달음식으로 연명한 주제에 요리를 나보다 잘한다. 먹고 싶은 요리가 있으면 레시피를 대충 훑어보고는 비슷한 음식을 뚝딱 만든다. 나에게는 그저 경이로운 마술처럼 보인다. 


나는 한 가지 요리를 완성하려면 그것이 아무리 간단하더라도 레시피를 보고 또 보고 닳도록 읽는다. 감자를 썰라고 하면, 감자를 다 썰고 또 보고, 당근을 썰라고 하면 당근을 썰고 또 한 번 본다. 그렇게 하다 보면 카레 하나 끓이는데도 꽤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요리하는 행위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요리를 할 때 재료를 때려 붓는다. 양파를 반 쪽만 사용하라고 했더라도 하나를 다 썰어 넣는다. 같은 요리를 일주일 내내 끓여먹는 한이 있어도 매일 몇 시간씩 요리를 하는 일은 피하고 싶다. 요리 레시피에 한정해서 나는 기억상실증을 앓는 것이 확실하다. 몇 년을 같은 레시피로 끓인 미역국도 여전히 냉장고에 붙은 종이를 보지 않으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요리를 못하는 주된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요리 중간과정에서 간 보기를 일절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부분은 나도 깨끗하게 인정하지만 나에게도 간 보기를 거절하는 나만의 사정이 있다. 남편에게는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내 속내를 털어놓아보려 한다.


간 보기는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무척 자극적인(?) 행위이다. 한국 집밥은 국과 찌개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으며 그 국과 찌개는 대게 맵거나 짜다. 나는 영락없는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태어났지만 혀만큼은 어느 서양인을 데려오더라도 빠지지 않을 입맛의 소유자다. 최애 음식은 피자와 파스타이고, 담백하고 고소한 맛의 플레인 빵에 버터만 발라도 환장한다. 어릴 적에는 편식도 무척이나 심해서 맨밥에 국과 찌개에 들어있는 건더기만 조금 건져서 먹고 혀에 덜 자극적인 반찬으로만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나에게 있어 한국의 국과 찌개는 달갑지 않은 자극 덩어리였다. 


성인이 되어서 혀가 자극에 덜 민감해졌지만 여전히 신라면은 꿈도 못 꾸고, 음식점에 가서 밥 없이 김치나 단무지 같은 자극적인 반찬을 맨입에 먹는 남편이 마냥 신기하다. 나와 상반된 입맛을 가지고 있는 남편 덕택에 어릴 적에는 상상도 못 하던 자극적인 음식들을 접하며 점차 혀도 강한 자극에 단련이 되고 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나의 혀는 자극을 피하고 싶어 하고 그래서 요리를 할 때 간을 보는 게 괴로우리만치 싫다. 


이것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요리를 하다가 국이나 찌개의 간을 억지로 봤다고 치자. 간을 보고 난 후 나의 뇌는 순수한 백지상태가 된다. 혀의 미뢰를 통해 어떤 자극이 뇌까지는 도달하더라도, 그 후 뇌로부터 어떠한 명령도 하달받지 못한다. 믿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요리 앞에서 나는 그만큼 바보가 된다. 내가 이 요리를 통하여 도달해야 하는 최종 맛 데이터 자체가 뇌에 없다 보니 비교를 할 수 없고, 비교를 할 수 없으니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어쩌다 싱겁다는 걸 깨닫고 물을 부었다고 해도 간이 싱거워졌을 때는 어떤 맛이 더해져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초조해지기 일쑤다.    


요리 분야를 제외한다면 나의 뇌는 꽤 쓸만하다. 복잡한 가구 조립도 쉽게 뚝딱 해내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는 확실히 재능이 있다. 운동도 잘하고, 논리적인 대화도 잘하는데 왜 요리 앞에만 서면... 백치가 되는 걸까. 


내가 하도 간을 안 보자 남편의 잔소리가 디스랩 베틀 수준이 되어 내 귀에 내리 꽂혔다. "사람이 요리는 못 할 수 있어. 그래, 못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당신은 개선할 의지가 없는 거야. 처음부터 맛있게 어떻게 하겠어. 나도 맨날 시행착오를 하는 걸. 하지만 간을 안 보면 늘 수가 없어. 간 보는 게 뭐가 어렵다고 거부하는 거야? 싱거우면 대충 소금을 더 넣던가, 간장을 넣던가, 고추장을 더 넣거나, 된장을 더 풀 수도 있지. 그리고 또 맛을 봐. 그러면서 맞춰나가는 거지. 짜면 물만 더 부으면 되는 거고. 자기야! 어려운 거 아니야. 요리는 정말 쉬워. 간을 봐. 간을 봐야 요리가 늘어. 알았지? 간 꼭 봐. 알았지? 간을 보면 해결돼. 자기야, 간을 봐!!!" 


남편의 말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의 연약한 맨 혀로 간 볼 생각을 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하... 인생에는 정말 싫어도 내가 꼭 마주해야 하는 시련이 있는 법. 간 보기가 그런 시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래도 극복해보기로 다짐한다. 


내일부터 나는 간 보는 아내로 다시 태어나는 거다! 

기다려라, 남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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