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뮤 Mar 20. 2020

어? 이거 완전 내 얘기

응, 그거 완전 니 얘기



띡띡띡띡-.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설거지하느라 젖은 손을 빛보다 빠르게 허리춤에 문질러 닦고 현관 쪽 커튼 뒤로 숨었다. 중문이 따로 없는 작은 아파트라서 방한용으로 현관 앞에 친 커튼인데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깜짝 놀라게 하는 용도로 더욱 요긴하게 쓰고 있다. 커튼이 생긴 후로는 매번 뒤에 숨어 그를 기다렸다. 이제는 오히려 내가 커튼 뒤에 없으면 놀랄 정도가 되었다. 오늘은 3일 만에 출장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초심으로 돌아가 전열을 가다듬었다.

 

"어흥!"

맹수처럼 커튼을 열어젖히고 남편에게 달려들었다. 남편은 역시나 예상했다는 표정이었지만 광대가 실룩거렸다. 서로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은 우리는 며칠간의 그리움을 담아 요란하게 인사했다. 사랑은 역시나 노란 고무줄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있을 때는 느슨하다가도 서로가 사정거리에서 멀어지면 여지없이 끌어당기고 싶어 참을 수가 없어진다. 그 순간 남편 목덜미에서 시큼하게 올라오는 땀냄새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남편은 손을 씻고 양말을 벗어 패기 좋게 화장실 앞에 던졌다. 내가 조용히 "여보 거기 아니야"하며 검지 손가락을 까딱이자 남편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 내가 집에 너무 오랜만에 와서 다 까먹었네"하며 바보처럼 웃었다. 그는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사실 웃겼다) 하더니 다시 양말을 집어 들어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 문 앞으로 던졌다. 그래, 거기지. 나는 그에게 이왕 양말을 던져놓을 거면 차라리 방향이라도 맞춰서 세탁기 쪽으로 놓으라고 말했었다. 그는 내 부탁이 합리적으로 느껴진다며 그 이후로 꼬박꼬박 베란다 문 앞에 양말을 팽개쳤다. 베란다 문 앞에 그 작은 반 평짜리 공간이 우리의 휴전선인 셈이다. 




 우리는 TV 앞 작은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밤이 늦어서 간단한 맥주와 저번에 먹다 남은 과자 봉지를 두 개 꺼내 놓았다. 맥주로 입을 축이자 남편 입에 슬슬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열을 마친 그는 며칠간 나에게 하지 못한 회사 이야기를 와다다다다 쏟아냈다. 그는 여전히 회사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한참을 하소연하던 그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눈빛을 달리하며 나를 쳐다봤다. "아참, 나 그 사내 프로그램에 합격했대!" 그러면서 지나가는 말투로 "아 그거 끝날 때까지는 퇴사 못하겠네..."하고 말했다. 그 말을 마친 뒤 남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분명 출장 떠나기 전에는 당장이라도 사표를 던질 것처럼 말했는데 방금 남편의 표정을 보니 몇 달간은 퇴사 이야기가 쏙 들어갈 눈치였다. 남편 앞에 당근이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주황빛의 아주 탐스러운 당근이. 


나는 잘 되었다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는 "뭐 일단은..."이라며 말을 아꼈다. 나는 혹시 몰라 며칠 사이에 퇴사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인지 물었다.


"여보, 그래서 퇴사에 대한 지금 생각은 어때? 바뀌었어?"

"시기의 문제지. 퇴사는 할 거야. 그래도 이렇게 된 이상 퇴사하기 전에 공기업 쪽으로 미리 준비해보려고."  


내가 "그렇구나, 잘 생각했어"라고 말하려고 입을 막 떼는 찰나 남편이 "근데..."라며 말을 이었다.

.

.

.


"내가 오늘 낮에 '어? 이거 완전 내 얘기'하고 인터넷에서 무슨 남편의 퇴사에 관한 아내의 글을 읽었는데... 글쓴이가 마리뮤."


마리뮤는 내가 전부터 사용하던 닉네임이다. 

 

ㅇㅇ, 그거 니 얘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헐, 그거 어떻게 읽었어?!!!!!!"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웃었다. 남편도 내가 배를 잡고 웃자 덩달아 웃으면서 말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소름, 이거 뭐야 완전 내 얘기'하고 읽었는데 레알 내 얘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당신 왜 나 몰래 내 욕 쓰고 다니냐? 저번에 글 썼다는 게 그거 였구만? "


브런치에서 남편과 결혼 생활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제목은 무려 '쉿, 남편한테는 비밀이야'이다. 그렇다고 정말 철저한 비밀은 아니었고, 남편도 내가 자신에 대해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신기하게도 그는 내가 무슨 글을 쓰는지 전혀 궁금해하지도 몰래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안심하며 더욱 솔직하고 과감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런데 브런치 글이 종종 SNS나 웹사이트에 소개되는 이상 스마트폰 해비유저인 남편에게 내 글이 발견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남편은 캡처한 화면까지 보여주며 한참을 더 웃다가 "왜 지금 이 이야기도 글로 쓰시지?"라고 했다. 나는 "응, 쓸라고. 아, 너무 웃기다"라고 대꾸했다. 글감이 이렇게 떡 하고 굴러들어 오다니 이게 웬 횡잰가 싶었다. 나는 웃어서 찔끔 흐른 눈물을 훔치며 남편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글을 읽은 소감은 어때?"


순간 남편의 동공이 확장되면서 초점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태연한 척하면서도 묘하게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간 수집한 남편 행동 데이터에 의하면 이건 '혼란'과 '난처'의 시그널이다. 아마도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무척 난감한가 보다. 그가 몇 초간 생각을 쥐어짜더니 "음, 나중에 사업을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말했다.


??????????????????????


이번엔 내가 혼란과 난처 사이에서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남편의 우렁찬 방귀소리가 더 그럴싸하게 들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글에 대한 소감을 물었는데 난데없이 사업을 열심히 하겠다니. 이 남자의 언어영역은 상상이하다. 남편과 싸우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런 질문 피해야 한다.


 "이 영화 어땠어?"

"이 책 읽고 무슨 생각이 들었어?"

"나 오늘 어때?" 


서술형으로 생각을 묻는 질문을 하면 남편의 사고회로에 잠시 쇼트가 난다. 철저하게 몇 가지 정도의 범위 안에서 답을 고를 수 있는 객관식 질문이어야만 과부하가 걸리지 않는다.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니 글 어떻게 읽었냐니까 난데없이 웬 사업을 열심히 하겠다야?"라고 말했다. 남편의 뇌가 점점 과부하로 곧 웽- 하는 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나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알려줬다.


 "그냥 '재밌게 잘 읽었어', 혹은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신기했어'라든가 가볍게 떠오른 생각을 말해주면 되지."


남편의 동공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그는 뜸을 들이다 "다시 읽어보고 4월 달 되기 전에 말해줄게! 실은 꼼꼼하게 읽어보지는 못했어"라며 이실직고했다. 정말 신기한 남자다. 나였더라면 그게 누구든지 나에 대한 글을 썼다고 하면 집요하게 찾아서 눈에 불을 켜고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아하 웃기네. 이거 진짜 내 이야기네'하고 거기서 끝이었다.


나는 "아, 됐어ㅋㅋㅋㅋ. 무슨 한 페이지짜리 글 감상 말하는데 2주씩이나 걸리냐? 하여간 자기도 진짜 특이해"라고 말했다. 싱겁게 웃는 남편을 바라보면 나는 생각했다.  


'아, 앞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공감 욕구는 남편 외 독자분들께서 남긴 감동적인 댓글로 대체해야겠구나...'


그래도 남편의 이런 특이함이 사실 나에겐 축복이다. 자기에 대한 글인 걸 뻔히 알면서도 자세히 읽지 않는 이 느슨함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더욱 대담하고 솔직한 글쓰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직업 작가였더라면 최고의 베필을 만난 것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아니라는 점) 남편의 내조에 힘입어 앞으로도 더욱 글쓰기에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하고 싶다는 남편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