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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Mar 16. 2020

퇴사하고 싶다는 남편에 대하여

아내의 순도 100% 속마음



 남편은 "퇴사할까?"라는 말을 달고 산다. 업무 강도가 조금 심해지거나 퇴근이 몇 번 늦어지면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온 퀭한 눈을 하고는 "아, 진짜 퇴사해버릴까?"를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반응은 한결같다.


 "여보, 난 찬성이야. 여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그거라면 퇴사 해."


나는 한 번도 남편에게 나약한 소리 하지 말라는 둥, 조금만 참으라는 둥, 그래도 회사 다닐 때가 최고라는 둥 퇴사에 반대하는 말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말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왜 퇴사가 답인지 나를 설득하기 위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회사 생활은 답이 없어."

"N 선임 알지? 그분이 내 7년 뒤 모습이라는 걸 생각하면 숨이 막혀."

"회사는 부조리 덩어리야."

"맨날 보고만 하다 시간이 다 가! 아니 X발 문제 해결하게 일할 시간을 줘야 할 거 아냐. 똑같은 보고를 네 군데에 보내면 또 3시에 일일 보고 해야 하고. 내가 몸이 한 개인데 오만군데서 아주 쪼아대니 미치겠어!"

"우리 쪽 과실이 아닌데 지네들이 해결할 깜냥이 안되니까 책임 떠넘기고 우리 잘못이라고 위에 보고를 해서 열 받아 죽겠어."

"여보, 진짜야. 이 회사는 미래가 없어!"


 나는 잠자코 끝까지 듣다가 한 마디 한다.


"여보, 자기 힘든 거 알아. 난 찬성이라니까? 나는 자기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영혼 갈아 넣으면서 일하지 말고 진짜 원하는 게 뭔지 그걸 찾아서 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남편은 다음 날이 되면 또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진짜로 퇴사를 하고 싶다, 여기는 미래가 안 보인다, 내가 왜 퇴사를 해야 하냐면...


지 남편이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고 자기 스스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아내인 나의 순도 100% 속마음이다. 나는 정말로 남편이 퇴사를 결심 한다면 말릴 생각이 추호도 없다. 가장의 무게? 그런 건 개나 줘버리라지. 나에게 순종적이고 요리 잘하는 전통적인 아내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에게 절대로 가정의 경제적 책임을 혼자서 짊어지는 전통적 남편이 되어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번듯한 남편의 직장 덕에 혼자라면 상상도 못 할 윤택한 생활을 했다. 소고기의 특수부위도 참치회도 양갈비 구이도 남편 때문에 처음 먹어봤다. 나는 평범한 삶의 평균값이 무척 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맛있고 비싼 음식, 해외여행의 매력을 알고 나서 부에 대한 열망이 점점  커졌다. 나는 더 맛있는 음식과 더 여유로운 시간을 얻기 위해 부자가 되고 싶다. 그러나 이 부를 남편의 맹목적인 희생을 값으로 치르며 얻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원하는 부를 내가 직접 일구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언제든 평균의 삶에 대한 내 기준치를 초기화할 자신이 있다. 남편의 퇴사는 큰일이 아니다. 그는 능력 있는 남자고, 나는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여자다.


다만 남편이 퇴사를 한다면 그 결정이 진정으로 그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이기를 바란다.


남편은 나보다 4살이 어리다. 평소 우리의 나이 차이를 느낄 일은 거의 없다. 굳이 꼽자면 TV에 나온 서태지 멤버를 보고 '소방차 맞지?'라고 물었을 때 정도? 그러나 가끔 남편이 온실 속 화초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직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도련님 같달까.


 그는 제법 넉넉한 집안에서 컸다. 남편의 학업을 위해 그의 부모님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그는 물을 주면 주는 만큼 결과로 부모님에게 보답했다. 내 입장에서는 시련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삶을 살아온 남편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더 피나게' 노력했다는 그의 말은 믿는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등학교 시절 공부하던 썰을 푸는 그를 보면 어느 누구도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선택하고 밟아 온 지난 세월은 모두 실패가 없었다. 나는 그의 아내가 되어 그가 걸어온 삶들을 조금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었고, 이내 그의 삶에서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삶에 '나(我)'는 없었다.


삶의 근간 되는 모든 결정은 외부에서 이루어졌다. 시어머니는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을 둔 이웃 아주머니가 했다는 모든 교육을 어린 남편에게 똑같이 시켰고, 대학교 원서와 과 선택도 그 아주머니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써서 냈다고 한다. 대학에 가서는 친구들이 듣는 수업을 따라 듣고, 친구 따라 군대에 입대하고, 친구가 추천한 대학원 실험실에 지원하고, 졸업 후 친구가 다니고 있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꼭 친구와 상의 했다. 주변 사람들이 이미 검증한 정답만을 골랐던 것이다. 언젠가 그는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자신의 결정이라고 항변했지만 '도대체 어떤 일을 하고 싶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데?'하고 물으면 언제나 얼버무리고 말았다.


내가 채근하여 얻어낸 답은 "최종적으론 어찌 되었든 사업을 하고 싶어,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이게 다였다. 무슨 사업을 하고 싶은지, 얼마큼 벌고 싶은지를 뒤이어 물어보면 평소 투머치 토커의 패기는 어디 가고 또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나는 그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면 뭐든 좋다. 순도 100%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정말 시간을 들이고 숙고한 끝에 나온 결정이라면 그가 어디 아프리카 오지에 가자고 해도 떠날 용의가 있다.(물론 떠나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와 설득의 과정은 거치겠지만)


지금 그가 얼마나 괴로운지, 고통스러운지 잘 안다. 그가 힘들어할 때마다 나도 덩달아 기운이 빠지고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남편에게 아내로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퇴사나 해버릴까"가 아니라 "여보, 난 이런이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라는 의지와 확신이다.


 나는 그와 반대로 '돈'으로 쉽게 교환될 능력이나 재주는 한참 떨어지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는 삶과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의 경계만큼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고통도 만약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삶으로 가는 방향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면 이를 앙 물고 'Go'를 외칠 깡도 있다.


남들이 기대하는 삶이 아니어도 좋으니 남편이 조금은 길을 잃고 헤맸으면 좋겠다. 잘 닦아놓은 길에서 벗어나 보면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 아님을 깨닫지 않을까. 결국 문제는 그 길 끝에 내가 원하는 삶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다시 한번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여보, 나는 당신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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