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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Mar 13. 2020

여보, 자? 여보, 나 우울해.

피곤한 남편과 사람이 그리운 아내

 



 알아주는 수도꼭지답게 어젯밤에도 울었다. 눈물샘에 문제가 있는지 매일 밤 베개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눈물이 흐른다. 불편해서 안과에 꼭 가봐야지 하면서도 다음날 일어나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어제는 자의로 실컷 눈물을 쏟아냈다. 


 2월 중순부터 영어학원 아르바이트를 가지 않았다. 나는 주부이기도 하고, 다른 일도 따로 하고 있어서 원장님과 나는 특별한 고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필요할 때 가고, 필요하지 않을 때 편하게 쉬라고 말하는 관계이다. 나도 부득이한 사정이 생기면 다른 직장인들보다 편한 마음으로 양해를 구할 수 있다. 2월에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때문에 학원이 한산하다며 3월까지 쉬시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내심 기뻤다. 에어비앤비 청소와 학원 알바로 사실 조금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반백수의 삶을 받아들였는데 3월이 되자 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다. 3월 22일까지 학원 휴업 공고가 내려왔다. 그쯤에는 에어비앤비 예약도 전부 취소되어서 반백수가 아닌 완전한 백수가 되어버렸다.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정해서 청소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유튜브로 공부도 하고, 넷플릭스로 영화도 봤지만 이런 하루가 반복될수록 사람이 그리웠다. 너무 적적할 때는 마스크를 쓰고 근처 카페에 가서 바람을 쐬고 오기도 했지만 카페 안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주는 위로는 반대로 내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우울을 자극했다. 


 갑자기 회사에서 큰 이슈가 터진 남편은 2주간 출근도 일찍 하고 퇴근을 늦게 하고 있다. 가뜩이나 체력이 약한 남자인데 며칠 전에는 스트레스로 혈압이 160까지 올라 병원에 다녀왔다. 원래 남편에게 주말에만 술을 마시도록 허락했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에 힘들어하는 그를 보니 요새는 내가 먼저 맥주를 제안한다. 상사에게 영혼까지 털리고,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려 온 힘을 쏟는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기껏해야 술을 허락해주는 일뿐이라니... 


 아침에 눈을 뜨면 혼자 일어나, 혼자 아침을 챙겨 먹고, 저녁까지 아는 얼굴을 한 명도 마주하지 못한다. 평상시 라면 남편이 5시 반에 퇴근해서 적어도 6시쯤에는 반가운 얼굴을 마주 보며 식사도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데 요새는 저녁 8시에라도 오면 감사하다. 


 하루 종일 무료함에 짓눌린 아내와 하루 종일 업무에 짓눌린 남편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서로에게 얻을 수 없다. 아내는 그의 체온과 심장소리를 듣고 이 세상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느끼고 싶은 반면, 남편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고립을 원한다. 


 남편이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고단한 몸으로 침대에 들어가면 몇 초가 되지 않아 코를 골며 잠에 빠진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고 나는 또 말없이 핸드폰으로 유튜브 앱을 켠다. 하루 종일 봤는데 그래도 아직 볼만한 영상들은 많다. 지루하면 밀리의 서재로 책을 읽는다. 그것도 지루하면 인터넷 뉴스를 읽거나 넷플릭스를 시청한다. 자정이 넘어가도 남편은 깨지 않고, 체력을 낭비할 일이 없었던 나는 매일 밤 더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한다. 잠깐 자고 일어날 줄 알았던 남편이 아침까지 그대로 잘 것 같아서 입고 있던 양말을 벗겨 준다. 출근한 복장 그대로 자고 있는 그를 살짝 흔들어 깨워 옷도 갈아입고 양치만이라도 하고 자라고 한다.


 겨우 눈을 뜬 그는 불도 켜지 않은 방을 그림자처럼 빠져나갔다가 고양이 세수를 하고 돌아와 다시 눕는다. 몇 초만에 다시 단잠에 빠진 그를 침대맡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본다. 캄캄한 방에 누운 그는 시체 같다. 간간이 발작처럼 들리는 그의 코골이가 아니면 이 공간에 나 말고도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잠이라도 빨리 오면 좋으련만 내 몸과 정신은 '난 아직 쌩쌩한걸?'이라고 말하는 듯 방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일은 낮에 근처 공원에라도 나가 지칠 때까지 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지금 눈을 감아 잠을 청하고 내일 아침이 찾아오면 또 나는 혼자고 하루 종일 내가 아는 얼굴은 또다시 피클처럼 피곤에 절여진 남편뿐이겠구나 생각했다. 남편도 불쌍하고, 외딴섬에 유배된 듯한 나도 불쌍하다. 자연스레 눈물이 또 차오르고 무릎 위로 뚝뚝 떨어진다. 남편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심장소리를 듣고 싶어 품에 파고든다. 


"여보 자?... 여보, 나 우울해."


슬며시 눈을 뜬 남편이 등을 토닥이며 잠긴 목소리로 묻는다.


"여보 우울해? 갑자기 왜 우울해? 나한테 말해봐."


나는 남편이 잠시 깨어난 이 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어린아이처럼 횡설수설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꺼낸다. 


 "있지... 근 한 달 동안 아는 얼굴은 자기 말고는 한 명도 못 봤어. 답답하면 카페도 가긴 갔는데... 거기도 아는 얼굴이 없어... 언니네 가고 싶어도... 알잖아. 언니 임신한 거. 만에 하나라도 싶어서 못 가고. 친구도 그래... 전화도 하고... 카톡도 가끔은 하는데도 자꾸 나 혼자인 거 같아. 여보가 스트레스받으며 일하는 것도 안쓰럽고... 근데 자기 보면 너무 반가워서... 자꾸 막...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자기 피곤한 거 아니까. 근데 또 눈 뜨면 집에 나 혼자잖아... 그래서 우울해... 아는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 내일 엄마라도 올라오시라고 할까?"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바쁘게 일하던 사람이 또 갑자기 멈춰버리니까 더 우울했구나? 응, 그래. 주말에 어머님 오시라고 하자."라고 말했다. "응, 자기 어서 다시 자. 피곤하지? 나 괜찮아. 조금만 이렇게 옆에서 누워있다가 잘게." 남편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어서 다시 잠의 세계로 놓아줬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또 혼자였고, 카페에 왔더니 아는 얼굴이 한 명도 없다. 


 아는 사람과 자유롭게 약속을 잡고, 어떤 곳이든 자유롭게 가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수다를 떨다 침이 튀겨도 '앗, 미안'하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일상이 이렇게 절실한 적은 처음이다. 핸드폰과 텔레비전과 노트북 너머의 당신이 너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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