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저를 사랑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올해로 회사에 다닌 지 3년이 되었다. 정확히는 2년 11개월이 되었다. 나는 모 대기업의 17년도 하반기 공개채용 전형으로 입사했고, 야박하게도 2018년 1월 1일 새해 첫날부터 신입사원 연수를 가야 했다. 연수원에서 2주 동안 함께 취업한 친구들과 대기업 뽕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 기분은 몇 개월 가지도 않았고, 회사에 다닐수록 짜증 불평불만만 늘어났다. 한탄의 세월을 보내며 "아 이 회사 언제까지 다녀야 돼~!"라는 말만 주야장천 쏟아냈다.
그리고 이직에 대한 의지가 불타오를 때마다 들었던 생각 하나가 있었는데...
다음번 회사에는 '행복'이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이직에 대한 의지를 파스스 쫄아들게 만들었다.
그러니 나는 합리적으로 이직 준비를 하지 않았다. (사실 귀차니즘 + 무력감으로 현실에 안주했는데, 저 질문으로 대충 양심 찔리는 아픔을 무마했다.)
적당히 안정적인 직장,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동료들, 그다지 힘들지 않은 업무강도. 이 3박자에 3년이 지나버렸다. 좀 더 멋진 회사, 보다 재밌는 일, 잘 맞는 직무로 이직하고 싶다는 말만 하는 나는 a.k.a 빈수레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회사엔 나 말고 빈수레가 정말 많았다. 맨날 그만두고 싶다고, 맨날 다른 곳 가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탑티어 대기업에 다녔다면 조금 분위기가 달랐을까. 다들 더 나은 처우와 더 나은 근무환경을 원하면서 사람들은 노력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 진또배기 몇 명은 조용히 이직에 성공했다. (진짜 이직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행동거지가 요란스럽지가 않다.) 아무튼 나는 그 진또배기에 끼지 못하고 오늘도 요란하게 회사에 갔다가 요란하게 퇴근을 했다.
오늘 나는 이직 시험 시간을 잘못 알았다.
최근에는 신기하게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채용 공고(광고)가 떴다. 카피가 아주 멋스러웠다. '초봉 N천만 원! ㅇㅇ직무 ㅇㅇ직무 모집!' 주겠다는 돈이 몹시 맘에 들었다.
대기업도 아니었는데, 지금 연봉보다 몇백을 얹어서 신입사원 초봉으로 주겠다는 기업이었다. 신입이면 지금보다 책임도 덜할 거고, 또 새로운 친구들도 사귈 수 있고(?), 심지어 위치가 판교?! 와우~ 꿈꾸던 판교 라이프를 펼칠 수 있겠는걸 ^^!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운 좋게 1차 면접에 통과했다. 자소설 닷컴에서 취준생들의 채팅 내용을 보니까 대부분 1차는 붙여주는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기뻤다. (오랜만에 면접을 보았고 또 합격했으니 어찌 안 기쁘겠냐고~) 최종 합격을 한 것도 아닌데, 속으로 판교로 출근하는 생각, 붙으면 집은 어떡하지? 이사할까?, 팀원들한테는 미안하겠네 등등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켰다.
그리고 대망의 2차 면접 날이 다가왔다. 코 시국에 맞게 집에서 모든 면접은 원격으로 진행되는데, 오늘 자정까지 인 줄로 알았던 면접 응시시간이 사실은 오후 6시까지였던 것이다.
퇴근하고 밥 먹고 씻고 면접 준비하고 딱 면접을 보려고 접속한 순간~! 시험 응시 시간이 종료되었다는 알럿이 떴다. 한심한 나에게 또 자기애를 발휘하여 '에퉤퉤 안 가길 잘했어! 다른 곳 알아보자~' 라며 멍청함을 달랬다.
그리고 이직 시험 시간을 잘못 알았다는 사실 때문에 머리가 아찔~ 정신이 어질~ 하면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후... 그런데 또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면, 나에게는 매우 비슷한 전적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사건 발생은 아득한 2017년도로 거슬러간다.
17년도 2학기, 나는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취업을 바로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주변에서 모두들 취업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한 번 자소서나 써볼까? 하는 마음으로 가장 가고 싶은 기업 한 곳(OO전자)에 지원을 했다.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교수님들이 재직했던 곳이라서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궁금함이 있었다. 많이들 가고 싶어 하는 기업이기에 주변에 지원자가 많았는데 신기하게 1차 합격을 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아무튼 그래서 인적성 책을 3권이나 풀 정도로 열심히 인적성을 준비했다. (한 기업을 위해 인적성 책 3권이나 푸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추석 연휴에도 공부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대망의 인적성 날이 되었다. 나는 인적성 입실 시간인 12~1시 사이에 맞춰서 고사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조금 더 빨리 가서 근처 스타벅스에서 스콘과 자몽 허니 블랙티를 시켜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속으로는 점심시간이랑 겹치게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기업에 대해 어이가 없기도 했다.
12시 반쯤 30분은 먼저 들어가 있어야겠다 싶어서 지정된 학교로 이동했다. 신기하게도 새가 지저귀고, 햇살이 맑았으며, 거리는 한산했다. 다들 시험을 보러 안 오는 건가? 내가 너무 일찍 온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사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교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성들이 다가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무슨 일..? 저 인적성 보러 왔는데요?라고 말하자 "인적성은 12시까지 입실이었는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충격을 금치 못한 나는 증거를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메일을 확인한 결과 입실 시간은 11~12시 사이였다. 나는 12~1시 사이로 입실시간을 착각한 똥 멍청이였던 것이다. 미친놈
시트콤인가? 운명의 장난인가?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지만 명명백백히 내가.. 나란 놈이 정말 뇌가 어떻게 된 것인지 시간을 단단히 착각한 것이었다. 아침에도 확인하고 전 날에도 확인했던 그 시간이 왜 이제야 달라 보이는 건지...
그 날 나는 허무하고 허탈했지만, 이 경험을 공유해서 부디 이런 멍청한 사람이 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학교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나의 경험담을 공유했고, 우쭈쭈 하는 위로 댓글과 멍청하다는 악플도 달렸다.(사실이라서 악플이 아닌 건가?) 가장 기억에 남는 댓글은 극단적인 댓글이었는데 '님이 만약 그 회사에 입 했으면, 연수받으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을 거예요'라는 댓글이었다. 정말 오싹한 댓글이지만 나를 정신 승리하게 해 주었다.
오늘도 악플이 달릴까? 아니면 아무도 이 글을 읽지 못할까?
한 번은 실수라고 쳐도, 두 번을 이렇게 직장 관련 시간을 까먹는 것은 옹호의 여지가 없다. 못 믿겠지만 사실 나는 똑똑한 편인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증거는 없지만 믿어주세요) 이 글을 쓰면서 또 새로운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은근히 기뻐하는 나 자신이 레전드 같다.
실수 두 번으로 인생이 망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누군가는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멍청한 사람도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시기를... (+회사에서도 멍청한 거 아니야?라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회사에선 똑 부러지게 잘살고 있다. 증거는 없지만 진실입니다.)
아무튼 근데... 그래서 이직은 일단 또 실패했다. 젠장할. 그래도 오늘도 충격받고 수고한 멍청한 나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많은 취준생, 직장인들이 스스로의 실수에 너무 아파하지 않는 & 자책하지 않는 하루를 살아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