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1일부터 2021년 3월 13일까지
2021년. 불행하게도 여유시간이 많아졌다. 프리랜서가 여유시간이 늘었다는 것은 수입이 줄었다는 것을 뜻한다. 코로나 여파로 강연 0회 즉 강연 수입 0원, MC를 맡았던 프로그램도 차례로 종영 및 리뉴얼을 하며 카메라 앞에 설 자리가 없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말초신경 자극으로 덮어보자고 모터사이클 스로틀을 감거나 알코올로 간을 혹사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인생 속 큰 문제와 조우했을 때 대개 대응 방식은 두 개로 나뉜다. 나 자신에 화내는 것과 나 자신을 위하는 것. 난 역시 후자가 체질이다.
우선 가장 돈이 안 드는 방법으로 시간을 채우기로 했다. 독서다. 사놓고 안 읽은 것도 있고 누가 준 것도 있다. 이번에 산 것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근 10여 년간 책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클린턴, 오바마 식 독서법이랍시고 책 두세 권을 조금씩 번갈아가며 읽는다고 했다가 중간에 멈춘 것이 대부분이고 무엇보다 스마트폰식 텍스트 취득 방법 '휙휙 넘기며 눈에 들어오는 부분만 읽기'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책 한 권을 붙잡고 끊질기게 진도를 나아가는 것이 너무나 생경해졌기 때문이다.
바꿔야겠다. 백 투 클래식.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아예 습관으로 만들기로 했다.
2021년 새해 계획을 세우면서 매일매일 목표를 세우고 완수해 나갈 때마다 숫자를 붙이기로 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자세히 후술 하기로 한다.
Diet : 식사조절
English : 영어공부
Reading : 독서
Writing : 원고 작업
Training : 운동
독서를 다시 생활화하기 위해서 책은 한 권을 잡으면 끝까지 완독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중간에 다른 책은 읽지 않는다. 독서시간은 충실히 하기 위해 스마트폰은 꺼두거나 충전기에 걸어두고 다이소에서 구매한 2000원짜리 타이머를 15분으로 세팅했다. 최소 15분 그 이상 동안 넷플릭스도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카카오톡도 하지 않는다. 오직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만 읽는 것이다. 일주일 정도는 스마트폰을 파지 했을 때의 감각이 없어지니 너무 어색했지만 열흘 정도 지나자 타이머 없이 30분 이상 1시간을 갈 정도로 익숙해졌다.
또한 흐름을 미리 정하기로 했다. 코스 요리를 대접하는 곳을 가면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 메인디쉬를 거쳐 디저트까지 셰프가 정한 흐름이 있다. 책을 읽을 때도 이런 흐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물론 애피타이저라고 해서 딱히 가벼운 책이라 할 수 없지만 대 여섯 권 정도는 이런 흐름을 갖고 읽으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대성공이었다.
첫 번째 책
도쿄의 시간 기록자들 (정재혁, 꼼지락)
코로나 이전에 연말연시에는 일본에 자주 가곤 했다. 이때 일본에서 프로레슬링, 격투기 대형 이벤트가 열리니 관전, 해설 또는 참전(!)을 위해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랜딩 기어가 내려가고 몇 분 정도 지나 착륙하는지 세어보곤 했다. 경기가 끝나면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근육과 관절의 비명을 무시한 채 가부키쵸에서 생맥주를 혼자 벌컥 들이키는 것이 나의 패턴이었다. 그래서 그냥 일본 관련으로 시작을 해봤다.
93학번인 나는 일본 드라마 캠퍼스 노트를 보며 일본어 공부를 했다. 그 시기는 논노와 모노로 대변할 수 있다.
일본 잡지를 보며 일본을 동경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일본은 우경화로 인한 정치적 흉작이 국가 전체를 하향 평준화시켰다. 비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 속 영역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인과 장인정신.
이 단어들을 연이어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뻔하디 뻔한 전개의 아침 드라마처럼 한 없이 지루해 보인다. 하지만 막상 쳐다보면 그럭저럭 볼만한 것이 그게 다 실제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 참 뻔한 주제인 것 같지만 작가가 발품을 팔며 젊은 장인들을 섭외하고 인터뷰하고 촬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가문의 문양 가몬(家紋)을 만드는 하토바 부자(父子) 이야기. 각 집안을 상징하는 가몬은 헤이안 시대 때 만들어진 것인 일본에는 5만 개의 정해진 가몬이 있고 새로 만들려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 전혀 몰랐던 세계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귀하게 접했다.
두 번째 책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김영사)
코로나로 250만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 2020년도 2021년도 해쉬태그는 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 죽음으로부터 한껏 달아나기 위해 지금도 마스크를 쓰고 카페에 앉아 있다. 그렇다면 다른 형태로 매일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저자는 '하드 웍스'라는 특수 청소업체를 설립했고 일하고 있다. 여기서 특수 청소란 '죽은 자의 집 청소'다. 시신이 놓여 있는 곳이 바로 그의 일터다. 작가는 현관문을 뒤덮은 배달업체 스티커와 그 밑에 낙엽처럼 쌓여있는 독촉장 고지서에서부터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죽은 사람이라고 간단히 표현하기엔 부적절한, 좁은 단칸방에서 끊임없이 부패와 오염을 반복하며 완전히 다른 그 어떤 유기체로 바뀐 시신을 마주하며 차근차근 자기 일을 한다. 죽음을 치우며 삶의 공간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작가의 담담하고도 유려한 문체는 친절하게 내 손을 잡고 죽음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역설적으로 난 아직 살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 페이지 씩 넘기더 더 보여달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저자는 희미하게 웃을 뿐이다. 조금 더 기다리라고.
세 번째 책
냄새 (A.S. 바 위치, 세로)
앞서 읽은 책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냄새'다. 도쿄의 냄새를 난 기억하고 있다. 요시노야의 덮밥 냄새, 파친코 앞에 줄지어 서있던 추레한 남자들의 냄새, 여자 관객의 화장품 냄새 등등. 죽음의 냄새 또한 마찬가지다. 거의 2미터는 될 법한 140kg 거한의 서양인 레슬러가 링 기둥에 서서 나를 향해 날아올 때 맡았던 어디선가 식초를 바짝 졸이고 다시 썩힌 것 같았던 죽음의 냄새. 이 냄새는 대체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지금 내 노트북 옆에 놓여있는 아이스커피의 냄새를 정확하게 규격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흔히 와인 시음가들이 표현하는 덜 익은 녹색 망고 , 하얀 꽃 마치 갓 꺾은 꽃, 통에서 갓 꺼낸 테니스공, 가장자리에서 푸른빛(!) 이런 표현들을 어떻게 정형화할까? 아주 최근까지 철학은 냄새를 과학의 영역으로 밀어 넣었고 과학은 철학으로 떠밀며 중간에 문학은 두 세력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저자는 냄새가 어떻게 과학의 영역에서 존재하기 위해서 '과학적 학문'으로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분투해왔는지 서술한다.
사실 읽기 너무 어려웠다. 400페이지가 넘는 '과학책'인데다 전문용어가 난무해서 인터넷 사전을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망울의 배선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지만, 수용체 유전학은 토리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혼란스러워 보인다고 해서 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 뜻이 뭔지 알겠는가? 하지만 다 읽었다는 그 알 수 없는 뿌듯함과 좀 알 것 같은 부분에서 머리를 끄떡거리며 나 스스로를 나 스스로에게 자랑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던 책이었다.
네 번째 책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케이틀린 도티, 반비)
언더테이커. WWF 프로레슬러가 떠오르는 것이 당연지사. 미국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단체가 오염시킨 이 단어는 원래 의미가 '장의사'다. 저자 케이틀린 도티는 미국 장의사다. 어린 시절 우연히 쇼핑몰에서 작은 소녀가 추락사하는 것을 목격한 저자는 죽음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결국 20대 나이에 매일 죽음을 접할 수 있는 장의업계에 발을 디딘다. 직접 차를 몰고 현장으로 출동해 시신을 '수거'하고 미국식 장례의식에 맞추어 '화장'(化粧)한다. 어긋난 턱관절을 보수하고 얼굴에 화장품을 칠한다. 시신 안에 방부액을 넣어 냄새도 잡는다. 가족과의 의식이 끝나면 소각로에 넣고 화장(火葬)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죽은 아들의 장례비를 결제하며 카드 마일리지를 적립하려는 어머니, 배송받은 유골에 문제가 있다며 배상을 요구하는 유가족 등등. 온전하고 고귀한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그 끝을 이렇게 맞이하는 게 좋은 것일까. 크고 작은 사건이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인생에서 최종 대형 이벤트 '죽음'을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맞는 걸까. 이런 주제의식을 기저에 깔아놓았으면서 저자의 밝고 유쾌한(!) 문체가 잘 대비된다.
와인 평론가처럼 표현해보자면 아 맞다. 그래, 이베리아 반도에 탱고를 추는 여인은 책이다.
다섯 번째 책
공생 멸종 진화 (이정모, 나무나무)
삶과 죽음. 미시적으로 들여다봤으니 렌즈를 바꿔껴보자. 거시적으로 아주 거시적으로. 우주적 시점으로 말이다. 생명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고 어떻게 죽어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 작업이 반복되고 층층이 쌓이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 것일까. 그 사이에서 진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은 안 어렵다. 저자 이정모가 어미새가 먹이를 물어다 아기새 입에 넣어주듯 자상하게 쓴 덕분이다. 물론 일단 지나갔다가 다시 되돌아가 네이버 사전을 꺼낼 때가 있지만 앞서 읽었던 '냄새'에 비하면 정말 '다시 보니 선녀'같은 책이다. 생명체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멸종에 이르는 24가지 결정적 장면을 줌 인해서 간결하고 알기 쉽게 정리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저자의 지식뿐만 아니라 타고난 성품 같기도 하고 직업을 통해서 얻어진 능력 같기도 하다.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 서울 시립 박물관 등 과학의 경연장과 주말 놀이동산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다년간 일했던 경험이 지면을 통해서 펼쳐지는 듯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죽음 때문에 한껏 다운되었던 마음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가벼워졌다. 죽음과 멸종이 없다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살아갈 공간이 없다. 멸종이 없었다면 우린 집 밖에 티라노사우루스가 있는 세상에서 기가 한껏 눌린 채 살았을 것이다. 아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죽음은 단어 자체로 쓸쓸하고 두렵지만 - 극단적인 가정으로 - 죽음이 없다면, 사랑하는 내 어버이가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이고 나 또한 그렇다면 아마 부모와 자식의 관계부터 시작해 우리 인간관계는 모두 변질될 것이다. 떠나기 때문에 멸종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 '과학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얻었다.
여섯 번째 책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 (김현진, 프시케의 숲)
다시 삶으로 가보자. 다달이 내야 하는 월세, 알고 보니 바가지였던 휴대폰 약정 요금, 정말 엿같은 진상 손님, 찢어진 낙엽 같은 연애 경험담. 저자 김현진과는 10여 년 전 우연히 인터넷 방송에서 패널로 만났다. 넓은 보폭으로 걸으면서도 자세히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이었다. 사람에 대한 흥미가 있으니 그 사람이 쓴 글들을 새겨 읽기 시작했다. 그의 글을 지층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유롭지만 치열하고 넉넉하지만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넘친다. 책의 특성상 많은 개인사가 기술되어 있어 여기에 옮길 수 없지만 그런 드러냄을 통해서 자기 삶을 들여다보며 이리 와서 같이 보자고 우리에게 손짓한다.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게 사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답해주고 싶다. 맞다고. 정말 잘 살고 있다고. 그리고 응원한다고.
일곱 번째 책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존 르 카레, 열린 책들)
아주 엤날 일이다. 아주 오랫동안 정보기관에서 일했던 분이 있었고 이 분과 집 안과의 인연으로 나에게도 제안이 온 적이었다. 성향과 상황상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해 난 서울로 상경. 인터넷 서비스 회사를 거쳐 딴지일보에 들어갔다. 지금 돌아보면 로터리를 빙빙 돌고 있다가 그냥 내키는 대로 출구를 찾아 나왔는데 완전히 반대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내가 첫 번째 출구로 나아갔다면 난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삶과 죽음이란 주제에는 네 것 내 것이 없다. 지금 내가 살고 세상과 완전 다른 세상은 어떤 것일까. 르 카레로 가보기로 했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내 기억으론 1980년대 명화극장에서 리처드 버튼 주연의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영화였고 르카레를 다시 만난 것은 수십 년이 지난 EBS에서 방영했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그놈의 검열 때문에 영화에서 30%를 차지하는 안가 흡연 장면을 모두 모자이크를 해버려서 몰입이 깨져서 책으로 읽어야겠다고 맘먹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주문할 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와 주문했던 것. 애플과 MS가 없던 세상, 스마트폰과 구글링이 없던 세상에서 스파이들은 어떻게 적을 속이며 정보를 빼냈을까. 오직 사람과 사람이 육탄으로 만나야만 했던 시절. 하드보일드 스파이 소설이면서 영국 사회 아니 인간에 대한 통렬한 비판. 책 한 권 통 털어 딱 한번 나오는 격투씬과 총격전. 활자로 만들어내는 서스펜스가 무엇인지 르카레가 대가의 솜씨를 보여준다.
정리하며 ;
대출 프로그램이 있다. 우주에서 원자를 빌리는 프로그램이다. 인간은 대출받은 원자를 약 70여 년 정도 운용할 수 있으며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물론 우주라는 금융기관은 변덕이 심해서 갑자기 원자를 회수해 가기도 한다. 우린 이 대출계약을 초 단위로 갱신하며 살아간다. 언젠가 회수당할 원자이기에 운용기간만큼은 값지게 살아야 하며 가장 값진 것은 바로 공생이다.
머리 식힐 때 같이 읽으면 좋은 괴서 / 괴서 리뷰는 추후 예정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 (석용산, 고려원)
50 홍정욱 에세이 (홍정욱, 위즈덤 하우스)
나는 죄인입니다 (황교안, 밀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