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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훈 해설위원 Jun 06. 2023

 WWE에서 메일 보냈대요. 확인해 보세요.

반나절동안의 환상특급

"김위원 님, WWE에서 메일 보냈다는데 확인했어요?"

"네? 아뇨"

WWE 스맥다운 녹화를 끝내고 스튜디오 밖으로 나오자 담당피디가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이따가 확인해 보세요, 답 달라고 하던데"

"아..... 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자동차를 주차했던 풍림아이원빌딩으로 가면서 왜 나에게 메일을 보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걸어가는 와중에도 수십 번 메일박스를 새로고침을 했음은 물론이다. 복잡한 서현역 인근을 뚫고 나와

인터체인지를 통해 양재를 거쳐 일산 쪽으로 가면서 '혹시?'라는 단어를 맨 앞에 두고 과감한 상상을 시도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혹시? 출전오퍼 아닐까? 물론 정규 레귤러 출전은 아니겠고 무슨 이벤트 경기 같은 거 있는 게 아닐까?

WWE는 전 세계로 송출되고 있는데 세계 각지의 해설진들을 불러 모아서 스페셜 매치를 할 수도 있을 거야.

5년 전에 일본 스매쉬, DDT에 참전했는데 그때 타지리 같은WWE 슈퍼스터와 꽤 친하게 지냈지. 거기 있던 쿠시다는 지금 NXT가 있고.

그러고 보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야. 내부에서 '세계 각지의 해설자들을 모아보자' 이런 아이디어가 돌았는데 아 맞다 한국 해설자는

김남훈이라고 걘 레슬러야. 이렇게 서로 대거리를 주고받았을 수도 있지. 일본어 해설자는 쇼 후나키. 타카미치노쿠와 카이엔타이를 구성하기도 했었고 원래

일본 애니멀 하마구치 짐 출신이지. 아마 후나키와 초반에 붙지 않을까. 아 지금 입고 있는 코스튬은 너무 오래됐는데 새로 맞춰야겠지. 참 흉기는 어떻게 하지?

쇠사슬이나 목검을 들고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아마 안 되겠지? 그러면 수하물로 맡겨야 하는데 인천공항은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미국 JFK 공항에 도착해선

어떻게 하지? 인상 험악한 헤비급 동양인이 쇠사슬과 목검을 소지하고 게이트를 나가게 해 줄까? WWE 쪽에 뭔가 내 신분을 보장해 줄 서류 같은 걸 준비해 달라고 할까?

예전 일본 카부키쵸에서 일본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했을 땐 김남훈 일본어 위키를 보여줘서 위기를 모면했는데 영문 위키를 내가 만들어야 하나?

영어로 마이크웍도 준비해야 하나? 아 미리 준비 좀 해놀껄.


가는 것을 포기하고 멈추는 것을 포기한 어중간한 상태를 반복하던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올림픽도로를 탔을 땐 내 상상은 '혹시?'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확신의 단 게에 들어섰다. 마침 카플레이로 연결한 애플뮤직에선 WWE 브록레스너의 테마곡이   나왔다. 맞아. 이건 운명이야. 드디어 나에게 이런 기회가 온 거라고.

먼저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고 영문증명서를 발급받아야겠지. 일단 PDF로 떠서 메일로 보내고 나중에 원본을 보내면 될 거야. 오늘부터라도 지금 다니고 있는 코리안탑팀에

양해를 구해서라도 낙법연습부터 다시 차근차근해야겠다. 부모님에겐 뭐라고 하지? 일단 중계 때문에 미국 가는 거라고 하면 될까? 어쩌면 백스테이지에서 헐크호간이나

빈스맥맨을 만날 수도 있겠다. '아임 유어 빅 팬 신스 차일드 후드...' 그런데 같은 업계 종사자인데 팬이라고 해도 되나?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서 한 손으로 아이폰의 받은 메일함을 슬라이드 해서 새로고침했지만 아직 메일은 오지 않았다. 일단 집으로 들어가서 계획을 짜자.

이왕 미국에 시합하러 간 김에 다른 인디단체도 서킷을 돌고 오자. 두 서너 경기는 더 할 수 있을 거야. WWE해설은 녹화니까 이주정도 당겨놓고 가자. 좋아. 송탄 미군부대

기지촌에서 AFKN으로 WWF 프로레슬링을 원점으로 삼았던 김남훈이 이렇게 아메리칸드림 아니 송탄드림을 이루는구나. 냉장고에서 하이네켄 무알콜 맥주를 꺼내서

한 두 모금 마셨을 때쯤 식탁 위에 놓여있던 아이폰 받은 메일함에 굵은 볼드체 문자가 보였다. WWE 그렇다. 메일이 드디어 온 것이다.

 

혹시 잘못 보낸 것은 아니겠지? 내 메일 주소가 맞다. '터치스크린을 눌러 메일을 확인'하는 작업은 얼추 수 만 번은 했을 터인데 왜 이리 떨리던지 혹시나 삭제가 될까

마치 대통령 선거 때 기표하듯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정확하게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세 줄짜리 메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안녕. 남훈 김.

이번에 새로 WWE 폴로셔츠가 나왔는데 하나 보내줄게. 사이즈가 어떻게 돼?

친애하는 WWE"


나는 무알콜 맥주 한 모금 들이키고 답장을 적었다.


"2XL. Not Asian 2XL. American 2XL please. thanks"


실망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살짝 웃음도 나왔다가 이내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다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행복했었다. 반나절동안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던가. AFKN과 VHS테이프로 보던 WWF의 세계로, 나는 WWE 퍼포먼스 센타로 날아가고 있었다.

후나키 쇼와 경기도 뛰고 관객의 환호도 받았다. 백스테이지에서 트리플에이치와 악수도 했다. 빈스맥맨은 사우디 출장이라 못 왔다. 약 2주 뒤에 한국에서도

방영이 될 텐데 그럼 내가 내 경기를 해설해야 하나. 귀국하는 비행기에선 이 경험담을 나중에 에세이집 출간할 때 넣을 생각으로 원고로도 쓰고 있었다.

난 머릿속으로나마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경험을 모두 한 터였다.

약 열흘 뒤에 내가 부탁한 대로 WWE로고가 선명한 네이비블루의 폴로셔츠를 받았다. 그 셔츠는 얼추 만 4년이 지난 지금도 잘 입고 있다.

세탁을 할 때도 세탁망에 넣어서 최대한 손상이 가지 않게끔 강연이나 방송 등 꼭 필요할 때만 골라서 입고 있다.


- 인간어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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