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우사랑 Feb 15. 2022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with. 정소현_<가해자들>


천장과 바닥과 벽을 타인과 공유하고 사는 주민들은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소음과 진동에 어느 정도는 지쳐 있어 가해자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려볼 수 있을 법한데도, 단 한 명도 그녀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지 않았다. 피해자가 자신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보다는 자신 역시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일까 조심스러웠던 듯하다.


정소현_<가해자들> (p.134)






살고 있는 아파트는 옛날 복도식 아파트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여러 특성들 중에 가장 힘든 건 다른 집의 생활소음들이 고스란히 벽과 천장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일이다. 소리에 예민한 나는 새벽에 울리는 윗집의 알림 소리에 깨어나고, 쿵쿵 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다시 잠들기를 포기한다. 하루를 준비한다고 보기에 그 시간이 너무 빠르다. 새벽 4시 혹은 5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걸까.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매일 괜찮다 생각해도 몸이 아프거나, 전날 늦게 잠이 들거나 하는 날에는 당장 뛰어 올라가고 싶게 마음이 난폭해진다. 


난폭해진 마음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는 하루를 지내는 동안에는 대게 사라져 간다. 그런데 저녁이면 그 난폭함이 완전히 꺼지지 못한 불씨처럼 마음 한편에서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윗집의 발걸음 소리에 옆집의 대화 소리가 더해지면 마음은 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몸 곳곳으로 옮겨 다니기 시작한다. 일상 대화를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뭐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천장을 통해 쾅쾅 울리는 소음도, 벽을 통해 흘러드는 알고 싶지 않은 타인의 대화도 내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닌가를 매일 생각해 본다. 혼자 사는 나의 환경이 너무 조용해서 상대적으로 더 크게 들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소리에 유난히 예민함이 있다는 걸 나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그런 나의 신경이 한층 더 예민해졌다. 문제는 올림픽이다. 윗집의 발 망치 소리와 옆집의 커다란 대화 소리 사이에 이제 옆집 남자의 괴성이 더해졌다.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에, 나는 경기를 보지 않아도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탄식과 함성, 괴성과 웃음, 해설인지 욕설인지 모를 평가가 굵직한 한 남자의 목소리를 타고 시간 상관없이 나를 찌르기 때문이다. 이런 소리들의 경우 너무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 같이 대응하고 싶은 사나운 감정이 마음에 쌓여가다 보면 더 이상 쌓을 마음의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아서 어쩌지 못하는 날이 온다.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런 날은 분명히 온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쌓인 감정들을 덜어내고 마음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럴 때, 내가 떠올리는 건 이사 오기 전에 알고 지낸 이웃들이다. 


이전에 살았던 아파트 아랫집에는 종일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고, 엄마에게 혼나는 일이 일상인 쌍둥이 형제가 살았다. 옆집에는 매일 싸우면서 울고 불기를 반복하는 고3 아들과 엄마가 살았다. 그들이 내던 소음들은 지금의 아파트 소음들보다 몇 배는 더 컸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내는 소음이 소음이라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알았고, 그 집의 사정을 알았고, 왜 그런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지를 알았다. 사정을 알고 듣는 소리들엔 화보다 연민의 마음이 먼저 마중 나가게 된다는 걸 이전의 아파트에서 배웠다. 알고 지내는 사람, 사정을 아는 집안의 소리들은 완전히는 아니어도 참아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인간이 그런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진 그런 존재.


그럼 마음으로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내가 사는 경기도 지역에서는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이 많다. 하루를 일찍 시작해야 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매일 새벽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발소리에는 어쩌면 남들보다 일찍 고단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어떤 사람의 힘듦이 실려 있을지도 모른다. 매일 저녁 괴성을 질러대는 옆집 남자에게 그 시간은 힘들었을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함일 수도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들 나름의 삶을 살아나가고 있을 뿐이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내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나에게 나의 사정이 있는 것처럼 상대방에게도 그 사람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그런데 사람은 모든 문제에서 타인 탓을 하는 게 너무 쉬운 해결책이라 자꾸 그렇게 행동한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쓰지 않아도 우리는 사실 알고 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다르고 지내온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어떤 사람의 사정은 끝내 보이지 않아 결국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때도 나에게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사정이 있음을 인정하면 난폭하고 사나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기도 한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나오는 끔찍한 층간소음 사건들처럼 이 책의 주인공들도 결국 좋지 않은 결말을 맞는다. 안타까운 결말이지만, 그것이 현실이어서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책 끝 작가에 말에서 정소현 작가는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가해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상황이 무서워 그곳을 영영 떠났다."


벽과 천장을 공유하는 공동주택에 산다는 건 언제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나는 모르고 있지만, 이미 가해자일 수도 있다.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하게 이해해도 마음이 너그러워질 수 있다. 때때로 화가 나지만, 그래도 커다란 문제없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건 어쩌면 내가 내는 소리들을 그러려니 넘겨주는 좋은 이웃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내가 매일 타고 오르내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거울 밑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아름다운 음악소리도 타인에게는 소음이 될 수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주위에는 언제나 나와 다른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또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도 그들 각자의 사정으로 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매거진의 이전글 서운함이라는 단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