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사는 것이며
평안한 사람은 이 순간에 사는 것이다.
_노자
우리가 자주 하는 인사 중에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편안'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사용했고, 받았다.
그러다 노자의 이 문장을 읽고 문득 의문이 들었다.
두 문장은 구별해서 써야 하는 것인가?
사전의 의미로 보자면,
편안은 몸이나 마음이 걱정 없이 편하고 좋음,
평안은 걱정이나 아무 탈이 없이 무사함,
이라고 하는데, 얼핏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이런저런 검색들을 통해 정리를 해 보자면
편안은 외부환경이 가져다주는 느낌의 상태이고,
평안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의자에 앉으면 몸이 편안하고,
근심 걱정이 없으면 마음이 평안하고 처럼 말이다.
편안이 몸에, 평안이 마음에 조금 더 가까운 단어라고 받아들였다.
더해서.
얼마 전에 접하게 된 노자의 문장대로
평안한 사람이 이 순간에 사는 것이라면
평안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자주 사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안했으면 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인간관계가 넓지 않아 만나는 사람의 폭이 좁다.
하지만 은희경 작가의 소설 속 문장에 의하면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다수가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만 남은 지금,
나의 인간관계는 충분하다.
노자의 문장을 읽었던 날 아침에,
은희경 작가의 소설 속 문장을 읽었던 날에도,
피티 선생님에게 이 문장을 아침 인사로, 하루 인사로 주었다.
요즘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도,
허약하고 나약한 나를 매일 바꾸는 사람도,
그러니까 끊임없이 어떤 영향을 주는 사람이
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으므로.
그러므로.
피티 선생님도, 가까이서 자주 보는 친구도, 가끔 봐도 늘 마음이 가까운 친구들도,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는 조카도, 인생의 기준이 되는 노희경 작가님도,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제는 볼 수 없는 엄마.
더불어 여러 가지 각각의 이유로 등 돌려 멀어진 사람들까지.
나와 인연이라는 단어로 지나온 사람들, 그리고 지나고 있는 모든 사람이 평안하기를.
매일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그래도 뒤돌아 생각해 보면 대체로 평안한 인생의 길 위에 있기를.
사실, 어쩌면,
이 모든 바람은 지극히 이기적인 바람일 것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의 매일이 평안할 때,
그 사람들과 함께 걷는 나의 삶도 평안할 것임을 아니까.
나도 모르는 저 밑바닥의 내 마음이란 건 나의 평안일지도.
그래도 오늘,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이 이기적인 바람이 이루어지고 있기를, 하고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