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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니은 Aug 31. 2023

혼자 떠나는 유럽여행(포르투 편) - 09

포르투 바다와 맛집 가기


** 포르투 3일째





오늘은 좀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면접 보러 다닐 때 입으려고 롯데백화점 클로비스에서 샀으나 정작 면접에서는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검은색 재킷도 걸쳐 입었다. 큐빅 하나가 밑에 달린 드롭귀걸이까지 하니 제법 관광객 티를 좀 벗은 것 같다. 유니클로에서 산 내복과 손목이 헐거울 정도로 늘어난 회색 티셔츠를 같이 입으니 회색 티셔츠 안으로 검은색 내복이 겹쳐 보이는 덕분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레이어드로 멋 낸 느낌이 났다. 마지막으로 연보라색 머플러를 헐겁게 둘러매면 소박한 재료로 전력을 다한 꾸안꾸 룩 완성이다. 



뒤편에 죽어가는 꽃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런던에서 날아온 꽃다발은 시든 기색이 역력했으나 여전히 나의 셀카소품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성당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문 앞에 걸터앉아 오랜만에 제대로 꾸민 김에 셀카를 몇 장 열심히 찍었다. 동행인 언니와 바다 보러 가기로 한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므로 혼자 어제 갔던 시내를 다시 가서 본격적으로 카페도 가고 쇼핑도 좀 할 참이었다. 



카페에 들러 나타 두 개와 에스프레소 한잔을 세트로 파는 메뉴를 주문했다. 한국에서는 아메리카노도 잘 마시지 않지만 여기서는 에스프레소 작은 잔을 한두 잔씩 잘 마시고 있다. 에스프레소에 같이 준 설탕을 남김없이 부은 다음, 숟가락으로 저어 호로록 마셔버리면 쓴 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달짝지근해서 잔을 비운 다음 혀로 입술을 핥으며 남은 설탕가루도 마저 녹여먹는다. 에스프레소는 쓰기보다 달구나 싶은 것이 에스프레소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한국에서는 절대 안마시는 에소프레소




한국에도 에스프레소 바가 인기를 끌게 되면서 에스프레소 전문점으로 유명한 곳이 생기고, 다 마신 에스프레소 잔을 쌓아서 인증하는 게 유행이 되었던 적도 있지만 내가 유럽에서 처음 맛본 에스프레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다. 






아침이면 빵집이나 카페에 서서 에스프레소 작은 잔을 훌쩍 마시고 쿨하게 떠나는 할아버지들이 멋져 보여서 난 이곳이 낯설고 에스프레소도 처음 마셔보는 관광객이 아니에요, 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할아버지들을 따라서 주문한 에스프레소를 마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미화된 추억이 짬뽕된 포르투와 밀라노의 단출한 에스프레소가 한국에서 마시는 화려한 에스프레소와 같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니까 뭐(당연히 여행 갔을 때 마신 에스프레소가 훨씬 맛있지). 



저 분홍색 파우치는손난로에요 



나는 한껏 감상에 젖어 누가 찍어주는 척 휴대폰을 커피잔에 기대어 놓은 뒤 셀카를 여러 장 찍어 몇 장은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보낸 뒤 또 한참을 셀카를 찍은 뒤에야 자라에 옷을 사러 갔다. 자라는 포르투갈에서 사야 할인이 많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꼭 여기서 뭔가 건져가리라 하는 욕심도 났고 한국에서만 입어볼 수 없는 옷을 사서 입고 다니는 것도 멋지겠다 싶었기 때문에-한국에서 못 입는 옷은 해외에서도 못 입기 마련인데 여기라고 뭐 다를 것 같으냐-이것저것 걸쳐보다가 역시 회사에서 신을 구두 한 켤레와 재킷 한벌을 산 다음 언니와 만나기 위해 숙소에 짐을 놓으러 돌아갔다.



아무도 안찍어준다고 셀카 못찍을소냐




언니와 만나 전날 찾은 샌드위치 맛집에 들러 샌드위치를 하나씩 포장한 다음-나는 전날 먹었던 것과 같은 것을 주문했다-바다로 가는 전차를 탔다. 덜컹덜컹 천천히 달리는 전차에 앉아 사람들 머리 위로 휴대폰을 들어 지나가는 풍경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20분쯤 지났을까, 시내에서 볼 수 없었던 야자나무가 보이고 갈매기 우는 소리가 끼룩끼룩 들리기 시작했다. 바다에 도착한 것이다! 







전차에서 내려 같이 사진도 찍고 갈매기 구경도 했다. 초겨울 날씨라 바다에서 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바다에 가까이 가자거나, 발이라도 적셔볼래 하지 않았고 해변가에 있는 둑에 나란히 앉아 점심으로 싸 온 샌드위치 포장지를 벗겨냈다.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통에 머리카락이랑 빵을 같이 먹지 않으려고 애를 좀 써야 했다. 갓 구운 바게트가 식는 바람에 좀 질겨진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우리는 점잖게 바다를 구경했다. 이 고요함이 우리에게 자유로움을 주고 있었다. 우리는 현재를 떠나 과거도 미래도 아닌 어딘가에 와있는 사람들이었다. 농담이든 진실이든 이곳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무엇이나 꿈꿀 수 있었다. 해야 할 것이라고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를 보면서 느긋하게 포르투 최고의 샌드위치를 먹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언니 뭐해? 자...?



올 때 타고 온 전차를 다시 타고 조앤롤링이 영감을 받아 해리포터 서점으로 유명해진 곳에 갔다.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붐비는 포토스폿으로 유명한 계단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 뒤 각자 책 구경을 하면서 표지가 예쁜 책 사진을 찍었다. 이 서점에서 넷플릭스에서 방영되던 드라마 <아웃랜더>의 원작을 사고 싶었지만 영문판은 재고가 없어 살 수 없었기 때문에-영문판을 샀더라면 과연 그것을 완독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지만-아쉬움에 몇 장 뒤적이다 사진만 찍고 올 수밖에 없었다. 











비누와 와인 등 포르투 특산품과 기념품을 파는 잡화점으로 건너가 이것저것 구경했다. 포르투는 와인과 비누, 꿀이 유명하고 푸른 무늬 도자기로도 유명하다. 기념품으로 마그넷을 사볼까 싶어서 제일 좋은 것을 고르려고 기념품샵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만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역시 후회가 됐다. 기념할 만해서, 기념하려고 기념품이거늘, 기념품에 실용성을 따져 물었던 과거의 나 자신이여, 통렬히 반성하라······나중에 시어머니에게 포르투 여행 다녀오셨다는 친구에게 받았다며 내게 비누를 선물해 주셨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이렇게 포르투 기념품을 받고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언니와 나는 기념품 가게까지만 동행한 뒤 헤어졌다. 그 뒤로는 영영 연락이 끊겼고 지금에야 알 길이 전혀 없지만 포르투 여행을 떠올리면 영락없이 나의 과묵한 동행인이었던 그 언니가 생각난다. 







동행에 자신감을 얻은 덕분인지 저녁도 세명의 동행인과 함께 하기로 했다. 포르투에서 먹는 마지막 저녁이었다. 커다란 스테이크, 해물볶음, 해물탕 세 개를 시켰는데 넷이서 먹기에 충분할 만큼 양이 꽤 넉넉했다. 내가 옆자리에서 먹는 게 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부담감에 혀를 좀 과하게 굴렸고, 발음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음과 동시에 어설프게 말하느니 차라리 손으로 가리키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칭찬과 조롱을 동시에 받은 기분이 들었으므로 5년이 넘게 지난 일인데도 떠올리면 여전히 좀 부끄럽다. 







어차피 이들이 다신 볼 일 없는 사람들이라는 게 좀 위안이 됐고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마침내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첫 입을 맛보자마자 우리는 만면에 넉넉한 미소를 띠며 다정히 눈을 맞췄다. '나가사끼 짬뽕 맛이 나요' 우리는 함박웃음을 지우며 포르투 요리가 얼마나 칼칼한지,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지 감탄하며 이곳의 요리를 한껏 추어올렸다. 포르투 한복판에서 짬뽕라면 맛이 나는 요리를 먹는 것은 등산 후 정상에서 육개장 컵라면을 먹는 희열과 비슷한 것이었다. 나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술 한잔 하러 간다는 그들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 날이 밝으면 드디어 마지막 여행지인 밀라노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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