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배우다 안 싸워본 사람은 이 글을 읽을 수 없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나의 결혼일지입니다.
이번 주제는 '배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것을배웁니다. 일례로 저는 모친에게 전과로 수학을 배웠으며, 부친에게는 영단어를 배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갖은 무시와 구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특히 부친이 더 이상 말도 없이 경멸 어린 눈빛으로 침묵 속에서 저를 뜨악하게 바라보던 순간 느꼈던 모멸감은, 이십 년은 거뜬히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부친의 눈빛에서 '아니, 뭐 이런 바보 멍청이가 있어(그게 내 자식일 줄이야)······.'라는 대사를 분명히 읽어냈습니다. 속된 말로 하자면 그때 부친의 심경은 말잇못이었겠지요. 부친은 제게 의도치 않게 수십 년짜리 상처를 남겼습니다.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 중 하나에 입학함으로써 모친과 부친에게 숱하게 받았던 어린 시절의 설움을 극복했다고 여겼습니다만, 여전히 그 한심해 죽겠다는 눈빛만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배움의 역사는 저만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세계의 수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가족들로부터 문자부터 운전까지 이런 저런 다양한
배움을 받아왔고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명언 하나가 탄생했습니다.
'가족한테 뭐 배우는 거 아니야.'
저는 남편과 동갑입니다. 나이가 같으므로 당연히 저는 그를 연상으로 취급해주지 않습니다. 그는 1월생, 저는 9월생으로 그가 빠른 년생일지라도 말입니다. 남편이 억울해할 때면 저는 9가 1보다 큰 숫자임을 분명히 못 박아두고 뻔뻔하게 돌아섰습니다. 빠른 년생 따위······알 게 뭐람······이런 마음이었으니까요.
올해 6월을 기점으로 그는 저보다 1살 더 나이를 먹었고 합법적으로 연상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작정한 듯이, 그동안 이를 갈았다는 것처럼 서두에 '오빠가', '오빠는'을 남용하기 시작했습니다(저는 여전히 '알 게 뭐람······.'이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중입니다).
단순히 '오빠'라고 불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를 우선해 주고, 챙겨주고, 힘든 일이 있으면 대신해주고 싶은 그의 마음이라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가끔은 원치 않는 방패를 자처할 때가 있어 좀 난감합니다. 저도 잘할 수 있는 일인데 말이죠 재수가 없어.
오늘 처음으로 함께 천변으로 나가 러닝을 했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동영상으로 올바른 러닝 자세를 배우는 예습을 했고, 무릎을 높이 추켜올리며 준비운동을 하고 남편의 가르침 하에 다치지 않고 뛰기 위한 올바른 자세를 배워나갔습니다.
머리를 똑바로 들어 전방을 보고, 허리를 곧게 펴고, 엉덩이는 집어넣고, 무릎은 살짝 구부리고 발로 땅을 밟을 때는 꼭 중간이 땅에 닿게 하여 무릎이나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는 지치지 않고, 부상 없이 달릴 수 있는 방법을 아낌없이 공유하고 또 시연하고, 제가 잘하는지 옆, 뒤로 달리며 자세를 고쳐주는 등 열성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인데······자꾸 그 명언이 생각이 나질 뭡니까······, 가족한테 뭐 배우는 거 아니야······라는.
어느새 이를 꽉 물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습니다.
'그므흐그 느 므노즈 이프르 그(그만하고 너 먼저 앞으로 가)'
처음으로 4km를 천천히 달리는 동안(그와 같이 달리는 2km만 달리고 나머지는 뛰다 걷다 했습니다만) 쉽게 지치지 않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다 달리고 나서도 발목이나 무릎이 아프지 않았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흉내를 낸 만큼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은 거겠지요. 저는 남편 덕을 단단히 본 것이었습니다. 가족이므로 가르치는 사람은 너무 열성으로 임하고, 배우는 사람은 반발심으로 울렁거리는 탓에 그런 명언이 탄생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가족이니까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더 과해지는 거겠지요.
우리가 서로 담백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명언은 분명히 맞았는데 재수가 좀 없었는데······그런데 무릎이 아프지 않으니까 고맙기도 하고······그래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비록 집에 가서 달리는 자세에 대한 동영상 여섯 개를 보고 연습하자고 할 때 먼 산을 바라보긴 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