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에세이를 읽고
처음 일본 갔을 땐 놀랐다. 편의점에 떡이랑 빵 종류가 한국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떡은 한국에서만 먹는 건 줄 알았다.
한국 편의점에서 파는 떡은 요즘 유행하는 어쩌고 찹쌀 꼬치 정도인데 일본은 겨우 편의점인데도 앙금 올린 것, 크림이 든 것, 간장소스를 끼얹은 것으로 종류가 다양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떡을 많이 먹는 나라일지도 모른다.
문득 새해가 되면 일본에 가서 떡국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이 좋아져서 이젠 이런 말을 해도 매국노 취급을 받진 않겠지.
아버지는 다를 수 있다. 아버지는 언니가 사다 준 유니클로 히트텍을 입으면서도 노재팬을 외쳤다. 어릴 때 문방구에서 메이드 인 재팬 볼펜을 산 것이 걸리면 혼이 났다.
나는 커서 혼다, 렉서스 차를 모는 남자친구들을 사귀었고 외조부가 오사카에서 나고 자라 일제를 최고로 치는 외조부모님이 있으며 최고의 여행지를 도쿄로 꼽는 남자와 결혼했다.
나는 초등학생 때 이미연과 정준호, 허준호가 등장하는 조수미의 명성황후 ost <나 가거든>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어린 나이부터 일본에 대한 분노를 길러왔건만.
사노 요코 작가는 전후세대 교육을 받으며 한국에 대한 죄책감을 배웠기 때문에 한국을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른여섯 해 동안 그녀만 보면 제국주의 시절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국인 친구를 사귀며 묵묵히 욕받이가 되어 왔댔다.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금테 안경을 쓰고 머플러를 둘둘 둘러맨 욘사마라는 남자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었고 그의 흔적을 주어 섬기며 남이섬까지 오게 되었다. 굳건해 보였던 경계를 무너트린 일본 아줌마들의 파워에 감탄하면서 그녀는 한국에서 빨간 음식을 실컷 먹고 돌아갔다.
일본은 어딜 가든 화장실이 깨끗한 것도 놀라웠다. 한국 화장실은 백화점이나 지하철이나 지뢰 찾기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내가 들어간 칸의 변기뚜껑이 닫혀있을 때 그것을 슬쩍 집어 들어 올릴 때의 두근거림이란. 한국에서 어느 구석이나 깨끗했던 것은 호텔 화장실 정도이다.
일본 화장실은 지하철이나 카페나 식당이나 이크, 놀랄 일은 없었다. 다들 청결의 정도가 준수했다, 는 인상이다. 어딜 가나 맘 편히 볼 일을 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특히 작든 크든 어딘가 앉아서 볼일을 봐야 하는 나의 경우에는.
오 년 전 코타키나발루에 갔을 때는 반딧불 투어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을 아예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저급한 표현이지만) 잘 싼다고 생각했지만 온갖 벌레가 득시글거리는 그 변소에서는 차마 엉덩이를 붙일 수 없었다.
사노 요코 작가나 오미야 에리 작가 같은 일본의 중년-노년 작가의 에세이가 몹시 재밌다. 이런 시크하고 혼자서 잘 먹고 마시고 사는 여자들 얘기가 아주 좋다.
암이 재발하자 목숨과 돈은 아끼지 않겠다, 며 치료를 단호히 거부하고 재규어 매장에 가서 멋들어진 차를 뽑아 나온 사노 요코 작가도,
술에 진탕 취해서 늘 기억을 잃어버리고 맥북 컴퓨터 애플 로고가 흰 밥인 줄 알고 냅다 맥북 위로 카레를 부어버리는 오미야 에리 작가 이야기도 낄낄대며 읽었다.
죽기 전 아름다운 것을 실컷 보겠다며 패키지여행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귀여운 이야기며 그림을 잔뜩 쓰고 그리는 마스다 미리 작가 책도 담백한 감동을 줘서 몇 권은 두고두고 읽으려고 샀다.
내가 아는 일본 여자 작가들은 그래봤자 셋뿐이고 한 명은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혼자서 아주 성실하게 잘 사는 것 같아서 멋지다.
일본 요리도 별로 먹어본 적은 없지만 좋아한다. 내가 아는 일본 요리는 글로 읽은 것들이니까 당연히 먹어볼 수 없다.
초밥이나 텐동, 오코노미야끼처럼 흔하게 사 먹을 수 있는 그런 거 말고 아마 일본식 집밥일 것이다. 다시마말이나(아마 다시마 안에 다 영한 재료를 넣고 둘둘 만 것인가보다) 킨톤(고구마와 밤을 삶아 같이 으깨 섞은 것)도 있고,
꽁치나 도미 영양솥밥과 비트를 통째로 삶아서 버터를 발라 먹는다거나 돼지갈비찜에 라즈베리소스를 발라 먹는다던가.
어릴 때부터 미디어에서 본 일본 여자들은 좁은 발폭으로 새침하게 걸어가고 항상 무릎을 꿇고 얌전히 앉기에 성격도 그와 비슷할 것 같이서 친해지기 어렵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는데 책에서 본 일본 여자들은 매우 호쾌하고 대범해서 친구 먹고 싶다, 고 계속 생각하게 됐다.
초지일관 벌거숭이 속 츠지이 씨와 츠지이 씨 친구들은 진짜 제대로 놀 줄 아는 여자들이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들에 비하면 뭘 잘 모른다. 물론 노는 방식은 다 제각각이니까 서로 비교할 건 없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어떤 일본인 친구(내 친구는 아니다)는 영어를 잘 못하면서 영어를 쓰는 교수를 보고 저놈이 하는 영어는 머리가 아프다, 고 신랄하게 비웃기도 하고 좋아하는 아이돌과 함께라면 당장 관짝문을 닫고 갇히겠다느니, 그런 말도 한다. 나도 일본인 친구가 사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