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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주 Mar 05. 2023

아무튼, 일기

일기 중독자 겸 경력자의 5년 쓰기 소회

다섯 권. 성인이 되어 다섯 권의 일기를 채웠다. 햇수로 치면 5년이고, 일기장외에 기록하던 날들을 포함하면 일기를 쓴 기간은 더 길다. 대학도 4년이면 졸업이고, 신입 직장인도 2~3년이면 직급을 단다. 그러니까 일기 쓰기를 경력으로 친다면 나도 어디 가서 '저 일기 써요!'하고 말할 정도는 된다. 나름 일기 경력자라는 말씀.


일기를 쓴다고 하면 성실한 사람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초등학생 때의 일기 쓰기 숙제가 이런 고정관념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내 하루를 소재로 하는 글을 매일 작문해 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일기를 쓰는 나를 대단하게 본다. 하지만 성인의 일기 쓰기는 정말 별 것 아니다. 내 일기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어온 습관이 아니며, 칸트처럼 매일 꼬박꼬박 정량의 글을 정시에 만들지도 못할뿐더러, 무엇보다도 나는 가족과 룸메이트들이 공인한 게으름뱅이다. 일기는 나의 성실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다만 내가 일기를 쓴다, 이 하나의 사실만 있을 뿐. 성인 회원들도 구몬 학습지를 미루듯, 나도 초등학생 때처럼 일기가 쓰기 싫어 꾸물거린다. 연초에는 다짐이나 목표를 가지고 알록달록 일기를 꾸미지만, 그 이후로는 빈 공백을 남기기 싫어 억지로 글을 쓸 때가 많다. 가끔은 일주일 일기를 주말에 몰아 쓰느라 하루를 꼬박 날리기도 한다.


사실 일기 경력 5년 차로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굳이 일기를 쓸 필요는 없다. 특히 내 일기는, SNS에 올려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줄 글도 아니고, 쓰는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문장을 완성할 필요가 없어 '음슴체'로 쓰인 내 일기는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 때로는 나조차 보기 거북하다. 하루 출퇴근만으로도 고단한 직장인은 잠들기 직전 펜을 드는 시간을 아껴 일찍 자는 게 건강을 위해 나은 선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 본인의 만족을 위해 쓰는 글로, 그 외에는 어떤 쓸모도 없다. 하나의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애정보다는 관성으로 일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생긴다. 가끔은 그 관성에 밀려 일기를 쓸 때도 있다. 일기 권태기도 적지 않게 찾아온다.


하지만 일기 쓰기가 귀찮고 피곤하다는 몸과 달리, 마음은 이미 일기 중독자다.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나면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오늘의 일기 소재를 정리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기에 쓰려고 메모해 놓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날이면 일기 소재를 만들기 위해 꼬물꼬물 움직이고. 심지어 일기 쓰기에 대한 글을, 내 일기장이 아닌 공개적인 웹에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중독이다. 일기 쓰기 중독.


퇴사하고 싶은 회사원이 이번달만, 이번달만, 하다가 직급을 다는 것처럼, 나도 올해만, 올해만, 하다가 5년을 채웠다. 회사에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있듯, 일기에도 그런 매력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청소도 반년에 한 번 하는 게으른 내가 이렇게 오래 일기를 쓰지는 못하겠지. 뭐든 중독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고, 그건 일기 역시 마찬가지다. 오로지 나를 위한 글이기에, 일기는 날카롭고 뾰족해지곤 한다. 나를 괴롭히지 않고 오래오래 일기를 쓰기 위한 요령을 만들다 보니 벌써 다섯 권의 일기를 썼다. 일기에 쓰인 어떤 여행은 책이 되었고, 어떤 경험은 강연이 되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일기 소재가 되었다. 이 글을 올린 뒤에도, '브런치에 일기 쓰기 매거진을 만들었다'로 시작하는 일기를 쓸 거다.


올해의 일기장은 복숭아 코랄색 표지의 스프링 스케줄러다. 이전에 쓰던 일기장들에 비해, 올해 일기장은 아직 새것 같다. 사용감을 만들고 싶어 일부러 일기장을 험하게 다룰 때도 있지만 아직 일기장과 함께 할 나날이 10개월이나 남아있으니 우선은 얌전히 모시기로 했다.


작년과 재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올해에도 일기를 관두고 싶다는 생각과 태워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적지 않게 찾아오겠지만, 그럼에도 일기에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즐거운 일들이 많기를. 그렇게 무사히 마지막 장을 덮어 6년 차 일기 경력자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3월의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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