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선언 - 2. '숫자'가 되어버린 삶의 무게 1

돈, '효율'의 가장 충실한 대리인

by 닥터 F

우리는 1장에서 '효율'이라는 보이지 않는 신(神)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이 마침내 스스로의 형상(AI)을 빚어 이 땅에 강림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질문이 남습니다. 그 신은, 형체를 갖추기 전인 지난 수백 년간, 과연 무엇을 통해 이토록 강력하게 우리를 통치해왔을까요?


보이지 않는 신은 스스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자신의 권력을 지상에 대행할 '대리인'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신도들을 통제하며, 그 믿음을 공고히 할 가시적인 '상징'이 필요합니다.


지난 수백 년간, '효율'이라는 신이 내세운 가장 충실하고, 가장 무자비하며, 가장 완벽했던 대리인. 그것이 바로 '돈(Money)'이었습니다.


왜 하필 돈이었을까요?


'효율'의 신은 '따뜻한' 가치들을 혐오했습니다. 사랑, 명예, 우정, 공동체, 신뢰... 이러한 가치들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것들이 '측정'될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나의 사랑보다 얼마나 더 큽니까? 당신의 명예는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의 우정을 어떻게 숫자로 환산할 수 있습니까?


'효율'의 신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효율'의 신은 '숫자'를 사랑했습니다.


Principle5-K8S.jpg


돈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 '효율'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입니다.


돈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번역기'입니다. 돈은 이 세상의 모든 '가치(Value)'를 냉정하고 객관적인 '가격(Price)'으로 번역해냈습니다.


어느 화가의 열정이 담긴 그림은 '1억 원'이라는 숫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장인의 평생에 걸친 기술은 '월 500만 원'이라는 숫자가 되었습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GDP 성장률'이라는 숫자가 되었습니다.


돈은 모든 것을 '숫자'라는 단 하나의 언어로 통일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비교'하고, '서열' 매기며, '계산'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사랑의 크기는 측정할 수 없지만, 결혼식에 쓴 '비용'은 측정할 수 있습니다. 우정의 깊이는 측정할 수 없지만, 주고받은 '선물'의 가격은 측정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쓸모'는 측정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의 '연봉'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돈은 '효율'의 신이 내린 '계시'였습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하라. 그리하여 측정하고 비교하라."

이 냉정한 번역 능력 덕분에, 돈은 '효율'의 가장 충실한 대리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돈'이라는 대리인은, 우리 문명 전체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등식(Equation)'을 세웠습니다. 지난 수백 년간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온, 단 한 번도 의심받지 않았던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효율 = 돈 = 쓸모 = 생존'


이 네 단어는 완벽한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첫째, '효율'은 '돈'이었습니다. (Efficiency = Money)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것, 즉 더 적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더 많은 것을 생산하는 것이 더 많은 '돈'을 버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부자'는 '더 효율적인 인간'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둘째, '돈'은 '쓸모'였습니다. (Money = Worth/Utility) 더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은, 당신이 이 '효율'의 시스템 안에서 더 '쓸모'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연봉, 당신의 재산은, 당신이라는 존재의 '쓸모'에 대해 사회가 매긴 객관적인 '성적표'였습니다.


셋째, '쓸모'는 '생존'이었습니다. (Worth/Utility = Survival) 그리고 그 '쓸M'는 당신의 '생존'과 직결되었습니다. 이 시스템 안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쓸모'가 없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곧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우리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이 등식은 차가웠지만, 강력했습니다. 이것은 '효율'의 신이 우리에게 내린 '율법'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이 등식 앞에서 불안해했고, 이 등식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삶 전체를 기꺼이 맞추었습니다.


'성공'이란 이 등식의 최상단에 오르는 것이었고, '실패'란 이 등식에서 밀려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1장에서 보았던 '차가운 빛'은, 사실 AI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AI는 그 빛의 '완성형'일 뿐, 그 빛의 '원형'은 바로 '돈'이었습니다.


'돈'이라는 척도는 '효율'의 신앙을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절에서 보겠지만, 이 엔진은 우리의 삶 자체를 '숫자'의 무게로 짓누르기 시작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인간의 선언 - 1. 완벽한 효율, 그 차가운 빛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