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7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나는 비몽사몽간이었다. 겨우 정신줄을 잡고 내비게이터 언니의 안내를 따라 숙소로 가고 있었다. 내비게이터 언니, 맛집 언니, 나 순서로 우리는 일렬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사는 주택가를 지나가는데 터키 출신인 것 같은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나를 훓어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나는 인종차별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나는 인종차별을 겪어본 적은 없었지만 인종차별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복잡해졌다. 누군가에게 멸시와 경멸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걷고 있는데 어떤 깔끔한 차림의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랐는데, 자꾸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나를 살폈다. 여행 온다고 새로 산 코트에 기분 나쁜 초록색 이물질이 묻어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내 옷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제 남자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위쪽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거 건물이 늘어져 있었다. 순간 상상력이 발동했다. 시간은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였다. 밤새 술을 먹고 거나하게 취한 사람이 올라오는 토를 참지 못하고 미처 화장실로 향하기 전에 창밖으로 토를 내뿜는 장면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토사물을 맞았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당황했다. 다시 남자 쪽을 쳐다봤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내 머리를 닦아주려고 했다. 한번 더 당황했다. 머리에도 묻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까닭이었다. 나는 남자에게 휴지를 받아들고 머리에 묻은 토를 닦아냈다. 휴지에서는 희미한 박하향이 났다. 다시 상상력이 발동했다. 나는 불과 몇 분 전에 인종차별을 떠올리고 있던 터였다. 어떤 악의를 품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창 밖의 거리를 바라보며 이를 닦다가 지나가는 동양인 여자에게 치약 섞인 침을 뱉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앞서 가던 언니들이 길 모퉁이에서 멈춰서서 따라오지 않는 나를 불러서 겨우 정신 차릴 수 있었다. 나는 언니들에게 갔다.
남자는 자꾸 나를 따라왔다. 휴지를 들고 자꾸 도와주려고 했다. 언니들이 있는 곳까지도 집요하게 따라왔다. 당시 나는 남자가 굉장히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언니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남자가 휴지로 내 배낭도 닦아줘서 정신이 없었다. 나는 가방에도 누군가 뱉은 침이 묻은 줄 알고 가방을 앞으로 내려 확인했다. 언니들에게 말을 하려는데 남자가 말했다. "gracias(감사합니다.)"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려 표시했다. 나는 그동안 나를 도와준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 대한 비꼬는 표현인가 생각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마찬가지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물었다. "gracias?(감사합니다?)" 그리고 가방을 놓아둔 쪽을 확인했는데 가방이 사라지고 없었다. 만화 영화로 치자면 가방이 있던 자리에 가방 대신 텅빈 점선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다.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맛집 언니가 소리쳤다. "훔쳐갔어! 빨리 가봐!"
나는 불과 몇 미터 안 되는 코너를 돌아 길거리를 봤다. 거리는 텅비어 있었다. 그렇다. 나는 도난 당한 것이다. 몇 발자국 뛰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멈춰섰다. 여권과 돈을 보관한 작은 가방은 코트 안에 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나마 안심했다. 그런데 맛집 언니가 나를 쫓아오더니 말했다. "그 안에 내 여권 있짆아!" 다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드리드에서 버스를 타기 전에 언니는 내게 여권을 맡겼었다. 처음에 나는 거절했었다. 해외여행 중 여권의 중요성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중요한 물건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언니는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만 맡아주길 다시 한번 부탁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 가방을 잃어버린 것이다. 거리를 조금 수색해봤지만 거리에는 쥐새끼 한마리도 없었다. 내비게이터 언니가 정신이 빠진 우리 둘에게 말했다. "우선 숙소로 가자."
10분 정도 걸어가니 숙소가 나왔다. 나는 로비에서 와이파이를 연결해 엄마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다. 나는 엄마에게 신용카드를 중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 사이 맛집 언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15분이 넘게 흘렀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기다렸다. 맛집 언니는 길거리를 수색하고 왔다고 했다. 혹시라도 내 가방을 다 털고 쓰레기통에 버렸을까봐 거리 곳곳에 놓인 거대한 쓰레기 수거함을 뒤지고 왔다고 했다. 나는 내가 열심히가 아닌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길거리를 직접 돌아다녀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거란 생각도 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경찰서로 가기로 했다. 너무 아침 일찍이라 경찰서는 닫혀있었다. 내비게이터 언니와 나는 근처 버거킹에서 시간을 떼우기로 했다. 맛집 언니는 또 거리로 향했다.
경찰서에 가니 버스 터미널에서 봤던 남자가 먼저 와있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은 채로 앉아 있었다. 경찰이 내 이름을 부를 때쯤 맛집 언니도 허탕을 치고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경찰에게 가서 도난 신고를 했다. 경찰은 내게 도난 품목을 물어봤다. 나는 도난 품목을 떠올리다가 내가 단순히 배낭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낭 안에는 관광지를 돌아다닐 때 매고 다니던 크로스백, 신용카드와 민증이 든 지갑, DSLR 카메라, (비싼) 선글라스, 모자 등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맛집 언니 여권까지. 서류를 작성하고 경찰에게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물어봤다. 경찰은 머리를 차가운 눈으로 질문부터 잘못됐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러면서 진짜 운이 좋으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24시간 안에 찾지 못하면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기대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기운이 풀렸다. 경찰서를 나가려는데 옆에서 머리를 쥐어뜯던 남자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에게서 터미널에서 매고 있던 배낭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남자에게 짐은 그 배낭 하나였다. 한마디로 다 털린 것이다. 남자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키가 190cm는 돼 보였는데 울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신발도 신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돈과 여권과 옷이 든 케리어를 지켰다는 데 위안을 얻기로 했다.
문제는 여권이었다. 내 것도 아닌, 내가 맡고 있던 다른 사람의 여권 말이다. 숙소에 돌아와서 쉬는데 눈물이 터졌다. 나는 울먹이며 언니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언니도 눈물이 터졌다. 자기가 맡긴 게 잘못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바탕 울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EU 국가 내에서 이동한다고 해도 비행기를 타려면 여권이 필요했다. 임시 여권을 발급 받아야 했다. 인터넷에 바르셀로나 영사관을 검색해 봤다. 믿을 수 없는 기사 하나가 떴다. 불과 1-2년 전에 바르셀로나 영사관이 사라져서 바르셀로나에 사는 한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기사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구글 지도에 한국 영사관을 검색했다. 하나가 나왔다. 맛집 언니와 나는 우선 가보기로 하고 숙소를 나왔다.
영사관으로 향하는 길에 인지부조화가 왔다. 한인회는 성명까지 내며 바르셀로나 영사관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구글 지도는 영사관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과거 주소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리를 헤메대가 발견하고야 말았다. 건물 4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언니와 나는 입구까지 갔다. 문을 두드리려다가 순간 생각이 번뜩였다. 여기는 한국 영사관이 아니라 북한 영사관이었다. 'Republic of Korea' 앞에 수식어가 붙어있었다. 우리는 아무런 인기척도 내지 않고 조용히 건물을 나왔다. 아무 것도 모르고 문을 열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바르셀로나에는 한국 영사관이 없으며 임시 여권을 발급 받기 위해서는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드리드에 대사관이 있었다. 언니는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