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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23. 2021

마드리드

여행 컨셉 잡기

독일 대학은 4월에 개강한다. 나는 3월에 독일 땅을 밟았다. 혼자는 아니고 2명의 언니들과 함께였다. 우리는 새로운 땅을 혼자 밟기에는 겁이 많았기에 같은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함께 도착했다. 우리가 살게 된 도시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1시간 떨어진 킬(Kiel)이란 도시였다.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한 달 정도 일찍 왔지만, 내가 살게 된 도시는 적응하기엔 적응할 거리가 없는 작은 도시였다. 우리는 이틀만에 도시 전체를 파악했다. 개강까지 한 달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도착한 지 이틀만에 작은 권태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방에서 빈둥거리다가 심심해서 비행기표를 찾아봤다. 그러다 벌떡 일어났다. 함부르크에서 마드리드까지 가는 표가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나와있었다. 나는 언니들에게 곧바로 연락했다. 엄청 싸게 나온 표가 있는데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언니들은 좋다고 바로 답했다. 나는 표가 동날까봐 급하게 3명분을 예약했다. 표를 예약하고 나니 즐거움보단 두려움이 엄습했다. 당장 이틀 뒤 출발이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 여행을 계획했다. 딱히 특별할 건 없었고, 마드리드만 갔다오는 건 아쉬우니 바르셀로나까지 가자는 것이었다. 마드리드 1박 2일, 바르셀로나 2박 3일로 일정을 잡았다.


첫 여행은 설렜다. 드디어 유럽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그렇다. 나는 여행을 하기 위해 유럽에 온 것이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항상 철이 없었다. 그리고 계획도 없었다. 마드리드에 도착하고 나는 내가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 한 명이 핸드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이 언니를 '내비게이터'라고 부르겠다. 내비게이터 언니는 공항에서 버스 타는 길까지 우리를 안내했다. 이제는 숙소까지 가는 길을 찾아보고 있었다. 스페인 여행에서 언니는 길을 찾는 역할을 도맡았다.


무사히 숙소를 찾은 뒤 우리는 도시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내비게이터 언니가 우리를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으로 안내했다. 광장은 4층짜리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넓었다. 건물 1층에는 식당과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우리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맥주를 시켜먹었다. 아니, 나만 맥주를 먹고 언니들은 음료수를 먹었다. 여행의 의미가 일탈에 있다면, 여행의 묘미는 낮술에 있다. 나는 조금 취한 채로 평소에 즐겨 찍지 않던 사진을 찍었다. 집에서 DSLR 카메라도 들고 온 터였다.


살짝 들뜬 상태로 도시를 돌아다녔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장면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내비게이터 언니가 거대한 개똥을 밟았다. (길을 안내하기 위해) 맨 앞에서 걸어가던 내비게이터 언니는 그 거대한 똥무더기를 밟고 인상을 찌푸렸다. "으! 뭐야!" 맨 뒤에서 가던 나도 그제야 똥을 발견했다.(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일렬로 다녔다.) 나는 그 똥을 보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쥬라기 공원>을 떠올렸다. 공룡을 연구하는 박사는 사람보다 더 큰 공룡 똥을 손으로 뒤적거린다. 어떤 대형견이 한무더기 싸고 간 듯한 똥은 공룡 똥 만큼은 아니어도 비현실적으로 컸다. 내비게이터 언니가 똥 밟은 발을 털자 성인 남자 주먹 만한 똥덩어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내가 밟았다. 개똥과 인연이 깊은 편이지만 누가 밟은 똥을 밟기는 처음이었다. 우리 옆을 지나가던 여자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마드리드의 첫날은 '개똥'으로 기억된다.




내비게이터 언니 말고 다른 언니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만 검색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이 언니를 '맛집 헌터'라고 부르겠다. 나와 내비게이터 언니는 멍하니 누워있는데 맛집 헌터 언니가 음식점을 하나씩 추천해줬다. 당시 우리는 친하지 않았기에, 친하지 않으면 친절해지기에, 무엇보다 맛집 헌터 언니를 제외하면 맛집을 찾아다니는 편이 아니기에, 뭐든 좋다고 했다. 다른 것들도 먹었겠지만 오징어 튀김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늦게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우리는 토론을 했다.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계획에도 없던 프라도미술관 큐레이션을 예약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프라도미술관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지 몰라도 내게는 꽤 인상깊은 경험이었다. 나는 미술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무엇이든 그려 놓고 아무 말을 덧붙이는 것이 미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의 영향이 크다.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은 괴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예술가였다. 그러니까 선생 재목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가차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음... 이건 쓰레기야." 그러면 악에 받친 학생들은 진정한 쓰레기를 보여주겠다며 종이에 물감을 뿌리거나 종이를 꾸기는 식으로 반항했다. 그러면 미술 선생님은 칭찬해주셨다. 작가의 정신세계가 느껴진다나 뭐라나.


미술 선생님은 한 학기 동안 어떤 변기통을 열정적으로 설명했었다. 맨날 똑같은 내용이어서 나는 졸았다. 졸다가 뒤로 쫓겨났고, 뒤에 앉아서 몰래 자다가 교실 앞으로 불려갔다. "아주 집요한 녀석이로구나." 나는 그때 생각했다. 그깟 변기통이 뭐라고! 변기통은 마르셸 뒤샹의 <샘(Fountain)>란 작품이었다. 미술 선생님은 마르셸 뒤샹이 왜 대단한지 침을 튀기며 설명해주셨지만, 나는 (맨 앞에 선 채로 침받이 역할을 하며) 왜 변기가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변기의 이름이 '샘(Sam)'이란 것을 외웠다.(당시에는 진짜로 변기 이름이 영화 <아이 엠 샘> 주인공과 같은 줄 알았다.)


미술은 내게 난해한 영역이었다.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인 영역이 미술이라고 생각했다. 미술 선생님의 예술적 감수성은 이해불가의 영역이었다. 그래도 포스트모더니즘적 친절함을 장착하고 있었기에 시험에 대해서 만큼은 관대한 편이어서 시험에 나올 그림들을 골라줬다. 그 중에 하나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미술책 왼편에 작게 자리잡고 있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실제로 보니 아주 거대한 작품이었다. 실제로 보니 크기부터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큐레이터는 <시녀들>이란 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유치원 아이들에게 하듯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베라스케스는 자신이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는 순간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을 그려 넣었다. 가운데 서있는 공주가 아닌 붓을 들고 있는 화가인 자신이 주인공이다. 실제 같은 사실주의적 묘사를 바라보는 것 자체로도 즐거웠지만, 작가의 자의식이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이 그림 멋있다고? 저기 당당히 서있는 내가 그린 거야.' 화가가 이런 말을 하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예술은 어떻게 보면 예술가의 장난이며, 우리는 그들의 아름다운 장난을 즐기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큐레이터는 이날 우리에게 티치아노 등 화가의 이름을 외우게 하며 작품이 탄생한 배경을 들려줬다. 꽤 긴 시간 동안 설명을 들었는데 지겹지 않았다. 이후로 나의 유럽여행 컨셉은 '미술관'이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미술관  탐방을 마치고 우리는 아기돼지 통구이를 먹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드리드 근교의 세고비아를 도착하자마자 '보틴'이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아기돼지 통구이는 말그대로 아기돼지를 통째로 구운 것만 같은 인상을 줬다. 조각난 몸들이 과거의 형체를 유추할 수 있게 놓여 있었고, 제일 앞에 머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건 없는 사람이었지만,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접시를 보니 약간 입맛이 떨어졌다. 개고기의 추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마을 원두막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마을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동생과 뛰어놀고 있는데 엄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떤 고기를 먹어보라고 권했다. 나는 아무런 의심없이 먹으려다가 엄마와 엄마를 둘러싼 아줌마들의 표정을 보고 멈춰섰었다. 나를 놀리듯 실실 쪼개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뭐냐고 물었다. 엄마는 대답을 해주지 않고 일단 먹어보라고 자꾸 권했다. 하도 권해서 먹어봤는데 맛있었다. 엄마가 뭐인 거 같냐고 물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돼지고기?" 엄마와 아줌마들은 뭐가 그리 웃긴지 막 웃기 시작했다. 엄마는 웃음을 겨우 참고 말했다. "개고기야."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어도 돼?"

"그럼. 다들 먹는 건데."

"엄마도 먹었어?"

"엄만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서."

나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개고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딱히 속이 역하지도 않았다. 개고기도 그냥 우리가 아는 고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후로 다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맛을 알아도, 그 맛이 나쁘지 않아도, 먹기 싫을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아기돼지의 맛을 먹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평소에 삼겹살이며 목살이며 돼지고기를 즐겨먹었다. 그러나 아기돼지 몸에서 나온 고기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확인받고 있짜니 이상하게 먹기가 싫었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어렸고, 엄마와 여행을 온 거라서 엄마가 돈을 낸 거였다면, 나는 입에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니들과 결코 싸지 않은 아기돼지 통구이 값을 1/n로 내야했고, 여행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기에, 평소라면 먹지 않았을 아기돼지를 먹었다.


아기돼지 맛은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두 입 정도 먹으니 느끼해져서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고기와 함께 시킨 레드와인을 벌컥벌컥 마셨다. 맛집 헌터 언니는 술을 잘 못 마시는 편이어서 내비게이터 언니와 내가 반병씩 비웠다. 식당은 고기가 느끼하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아기돼지의 죽음을 생각하며 아기돼지를 먹는 손님들의 혼란스러움을 예상해서인지, 도수 높은 와인을 갖다두었다. 와인은 도수가 높은 편이었다. 17도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정도로 와인을 본격적으로 먹어본 건 처음이었다. 고기가 기름져서 그런지 술맛이 좋았다. 벌컥벌컥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내 몸이 1미리 정도 떠있다고 느꼈다. 마음이 들떴다. 그리고 취해 있었다.


식당을 나오는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걸음걸이가 깃털 같이 가벼웠다. 내비게이터 언니와 나는 뛰듯이 걸었다. "언니, 이상해. 걷는 게 너무 신나!" 몇 분이나 그렇게 걸었을까. 나는 아주 즐거운 광경을 맞이했다. 로마시대에 지어진 웅장한 수도교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많이) 취한 상태여서 고개를 삐딱하게 두고 있었다. 삐딱한 채였지만 아치 구조가 눈에 띄었다. 아빠가 지겹도록 틀어 놓은 히스토리 채널이 떠올랐다. 매일같이 로마인들의 아치 구조를 찬양했다. 수도교가 2천 년을 견딜 수 있던 이유는 아치 구조의 견고함 덕분이었다. 아치 구조에서는 하강 압력을 받아도 양 옆의 돌로  힘이 분산된다. 그 결과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견고함이 완성됐다. 덕분에 로마인들은 깨끗한 물을 사용하며 위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과거에 수도교를 타고 내렸을 깨끗한 물을 생각하니 수도교가 시원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이 거대한 발명품 앞에서 사진을 엄청 많이 찍었다. 점프샷도 찍었다. 수도교 쪽으로 걸어가면서 벅찬 감정을 느꼈다. 나는 그 이유르 분명히 안다. 술 때문이었다. 이후 나는 여행을 하면서 술을 많이 마셨다. 술을 마시면 고대 유물도 재밌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마드리드 시내로 돌아왔다. 우리는 밤에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다. 버스를 타기 전까지 우리 셋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도 즐겁지만, 혼자 돌아다니는 여행은 그것만 매력이 있다. 내 의견을 굽힐 필요 없이 자유롭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된다. 그래서 나는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가더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걸 추천하는 편이다. 밥은 같이 먹되, 여행은 혼자하는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내 기억으로는 7시간 정도 걸렸다. 생각보다 자리가 좁고 사람들로 꽉 차있어서 많이 답답했다. 그리고 어떤 미친X이 노래를 밖으로 나오게 틀어놔서 제대로 자지 못했다. 감미로운 노래도 아니고 뿅뿅 소리 나는 노래여서 굉장히 열받았었다. 나는 출처를 찾다가 그 미친X이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2시간 가까이 지나서 알게된 이유는 그 미친X이 분명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는 시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폰 단자 연결이 제대로 안 된 듯 했다. 나는 과거에 고등학교 기숙사 사감 일을 하던 엄마가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엄마는 아이들의 조용한 야자시간을 관리했는데, 한 달 정도가 되니 일에 적응해서 그날 처음으로 노래를 들었었다. 물론 이어폰으로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리를 아무리 키워도 소리가 생각 만큼 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한 학생이 찾아왔다. "선생님, 이어폰 끼고 들으세요." 엄마는 그때 자기가 듣던 노래가 밖으로 새어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많이 민망해했다. 나는 그런 민망함을 아는 너그러움 사람이기에 옆자리 사람에게 이어폰 단자를 가리키며 제대로 꽂으라는 시뉴을 해보였다. 옆자리 미친X은 알게다고 하고 이어폰을 꽂았다. 나는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잠들었다. 그러다 또 노래소리에 깼다. 이 미친X이 이제는 이어폰을 빼고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자고 있었다. 나는 소심한 편이기에 깨우려다 말고 내 이어폰 노랫소리를 키웠다.(싸움 장면을 상상할 때 때리기보다는 두드려 맞는 상상을 더 많이 한다.) 결국 1시간도 채 못잔 채로 7시간 동안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쯤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상쾌했던 바르셀로나의 공기는 도착한 지 30분 되지 않아 텁텁해졌다. 맛집 헌터 언니가 마드리드에서 버스를 타기 전에 나에게 여권을 맡긴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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