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더듬기
가족들과 대화를 하다가 학창시절 반 번호 얘기가 나왔다. 엄마와 아빠는 40년 전인데도 자신의 번호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도 채 안 된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나에겐 꽤 충격적이었다. (몇 반이었는지 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사소한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자부해 왔던 터였다.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사소한 추억까지 손쉽게 기억해 내던 나였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언젠가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나는 기억에 집착하는 편이다.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과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기억은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조각들이다. 과거의 순간이 현재의 나를 정의한다. 나는 현재에 집착하기에 과거에 집착한다. 현재의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서 과거의 기억들을 붙들어내려는 사람이다.
독일 교환학생을 다녀온 지 벌써 5년이나 됐다. 말이 좋아 교환학생이었지 공부한 기억보다는 여행한 기억이 더 많다. 어느 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데 한 채널에서 피렌체를 소개하고 있었다. 피렌체 풍경들을 보니 예전 기억이 조금씩 돌아왔다. 나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피렌체를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기억하고 있다.(언젠가 1년 정도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부적인 기억들은 희미했다. 더 늦기 전에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5년이 지나서 쓰는 유럽여행기다. 기억은 정확하지 않고 강렬한 기억들만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린다. 나는 가능한 한 경험한 그대로 적으려고 하겠지만 어쩌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디를 갔고, 어디에서 무엇을 봤는지, 등과 같은 내용은 자세히 적지 않을 생각이다. 어차피 자세히 기억나지도 않는다. 만약 내가 자세히 묘사한다면 그것은 경험과 환상에 입각한 팩션(Faction)일 가능성이 높다. (믿어주면 좋겠지만) 믿거나 말거나다.
내가 쓰는 여행기는 장르로 따지자면 픽션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원래 인간의 감각은 개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관찰 역시 주관적일 뿐이다. 이야기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밌지 않는 이야기는 읽히지 않고, 읽히지 않는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유럽여행기를 쓰기에 앞서 나의 목표는 하나다. (최대한 사실에 입각해서 쓰려고 노력하겠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는 글을 쓸 예정이다. 보들레르의 말대로 "우리는 무엇에든 취해야" 하는 존재니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잠시나마 즐거움에 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